언젠가 내가 이곳에 올렸던 글 한편
'대포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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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머슴님의 글에서 단편 하나 골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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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봉천동 백구두
이근일(李根一)
아침부터 영천댁 부엌에서 들려오는 기명 부시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얄브스름한 미닫이 문으로 겨우 바람을 닫고 사는 터라, 그녀가 만들어내는 소음이 거침없이 문틈을 파고 들어와 잠을 깨운다. 암만해도 가로수를 누비는 택시 운전사 심호섭 씨가 간밤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마당으로 양은냄비가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급기야 사기그릇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는 듯한 파열음마저 들린다. 눈가늠을 해보니 아직은 이른 시간이다. 희부옇게 날이 밝아오지만 창호문에 동살이 기어오르자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영천댁이 심 씨에게 보이는 집착은 알아줘야 한다.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하다가도 그가 불쑥 외박이라도 하는 날이면 손바닥 뒤집듯이 돌변해서 저렇게 무언가를 죽기 살기로 물고 뜯는다. 그럴 때는 언뜻 보면 실성을 한 사람 같기도 하다. 사람이란 게 누구나 남 모르는 의외성을 지니고 살아갈 터이지만, 저렇듯 순식간에 둔갑을 하는 꼴을 보노라면 담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웃들조차 놀라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거나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그런 일만 아니라면 인물도 반반한데다 곰바지런하고 서분서분해서 달리 트집을 잡거나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다. 하긴 영천댁도 따지고 보면 어지간히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다. 고향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곳으로 시집을 갔던 모양인데, 시부모가 죽고 나니 서방이라는 작자가 노름질을 해서 분탕질을 시작하더란다. 막판에는 술집여자에게 눈이 돌아가서 소박까지 맞았다는데, 술집도 술집 나름이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옴팡집 출신이라는 게 더욱 분하다고 치를 떨었다. 그런 사연을 겪었으니 사내들이 피우는 바람이라면 신물이 날만도 하다. 언젠가 서툰 술 몇 모금에 눈자위가 붉어진 그녀가 푸념처럼 들려준 이야기다.
어느 해 겨울, 천지간을 분간 못할 만치 함박눈이 쏟아지던 날에 홀홀 단신 밤열차를 타고 상경길에 올랐더란다. 차갑고 어두운 차창에 기대어 눈물깨나 흘렸을 법한 그녀가, 지난 세월 온갖 궂은 일을 겪으며 이만한 살림을 이루기까지, 이를 악물고 살아온 발자취는 봉천동 산 56번지 일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거개가 알고 있는 일이다. 돌이켜 보면 그저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렇게 곁눈 한번 주지 않고 살아오던 그녀가 낙성대 근처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찬모(饌母)로 일하다가 심 씨를 만나 새살림을 꾸린지도 이태가 지났다. 시장에 나가면 자반고등어 몇 마리 고르는 데도 이리저리 뒤집어 꼼꼼히 살피고 냄새까지 킁킁 맡아보는 사람인데 여생을 맡길 사람을 고르면서 얼마나 예의 주시를 하고 심사숙고를 했으랴. 그런데 헛짚어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심 씨야 말로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다는 것이다. 기껏 십수 년을 혼자서 잘 지내다가 중년에 이르러 마음을 먹고 만난 사람이 가로수를 누비는 게 아니라 가랑이를 누비고 자빠졌다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전생에 무슨 한이나 맺힌 사람처럼 치마를 두른 여자만 보면 죽기 살기로 꽁무니를 쫓아다녔다는데 그 동안 영천댁만 감쪽같이 몰랐다는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모르되 그때는 이미 정이 들대로 들어버린 뒤였다. 남녀의 관계란 것이 어물전 생선처럼 물이 갔다고 해서 쫓아가서 되물릴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케케묵은 소리라고 구박깨나 해대겠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만큼은 그랬다. 씨름판처럼 한번 엎어지고 나면 볼장 다 본 거라고 철석 같이 믿는 그녀였고 이왕지사 그렇게 된 거, 어떻게든 여필종부를 하겠다는 데야 누가 그녀를 두고 새삼 뭐라 하겠는가. 아무도 그걸 두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다만 저러다가 명대로 살다 가겠는가 싶어서 안쓰럽기 짝이 없어 한마디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영천댁에게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사람을 주로 생김새를 가지고 저울질을 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매사에 사람을 대하는 걸 보면 노상 그래 왔으니까. 행여 내가 물이라도 헤프게 쓰는 눈치면 콧구멍이 커서 씀씀이가 야물지 못하다고 핀잔을 놓았다. 문간방 미스 송이 밤 늦은 시간 술에 취해 들어와서 처마기둥을 기둥서방처럼 끌어안고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것을 보노라면, 평소에 콩만한 엉덩이를 야들야들 흔들고 걷는 습관 때문에 저리도 팔자가 사나운 거라고 어김없이 앙칼진 소리를 뱉어냈다.
마치 세상사가 생긴 꼬락서니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확고한 결정론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녀가 심 씨를 만나게 된 동기는 자기 말마따나 오직 '한군데도 빠진 데 없이 잘생겼다'는 데 있고, 저만한 인물에 어디 가서 무얼 못하겠냐는 것이었다. 하긴 외모를 놓고 보면 누가 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쉬는 날이면 야태(野態)스럽게도 에나멜 소재로 된 백구두를 신고 돌아다니는 게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얼굴 하나만큼은 어디다 내놓아도 기죽지 않을 만치 잘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것이 바로 함정이다. 영천댁은 그의 반듯한 이목구비를 보고 기울어가는 청춘을 쓰러지듯이 맡겼을 터이지만, 오늘날 한숨을 폭폭 쉬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제는 부엌문 닫는 소리가 마치 천둥벼락을 치는 것 같다. 나는 다시 이불을 둘둘 말고 벽으로 몸을 붙였다. 소나기는 피해 간다고 이런 날은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게 상수다. 서로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밀린 방세를 가지고 포탄을 날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새벽밥 먹고 뛰어나갈 일도 없는데 괜히 얼쩡거리다가 유탄에 맞을 일은 없지 않는가.
내가 무릎이 후들후들 떨리도록 가풀라진 봉천동 산 56번지에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순전히 홍만식 때문이다. 남들이 시덥잖게 여기는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홀로 사는 어머니가 평생을 부쳐먹던 논밭뙈기를 처분해서 변두리나마 서민아파트를 한 채 장만해 주었으니 열심히 살아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비록 중소기업일 망정 그런대로 직장은 탄탄했고, 이제 마땅한 배필만 나타나면 어머니를 모셔다가 오순도순 살아가리라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던 참이었다. 지지난해 가을이었다. 도시의 빌딩숲에도 바람이 소슬해지고 갈색으로 변한 손바닥만한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길바닥에 떨어져 행인들의 발길에 와삭와삭 밟히던 퇴근길이었다. 회사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새카만 고급승용차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와서 멈춰 섰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대학 동창인 홍만식이었다. 내가 놀란 만도 한 것은 학창시절 그의 모습이 눈에 나도록 꼬질꼬질했던 터였다. 그런데 웬걸, 촌놈 오복이 같던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살이 통통하게 올랐고 몹시 기름져 보였다. 야, 오랜만이다. 거기서 뭐하냐? 그가 몸을 구부려 열린 차창으로 손을 내밀었고 나는 엉겁결에 그의 도톰한 손을 맞잡았다. 방향이 같다고 해서 동승을 하게 되었다. 차 안에는 어질머리가 나도록 천박한 향료 냄새가 진동을 했고, 벼락출세에 허파가 부은 듯 어딘가 되바라진 구석이 뇌꼴사납긴 했지만, 내심 호기롭게 떠들어대는 그가 부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바닥에서 박박 기어야 하는 말단사원으로 지내는 나로서는 단박에 야코가 팍 죽어서 건네 받은 그의 명함을 이리저리 살피며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야 했다. 그는 분양회사 사장인 삼촌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젊은 나이에 벌써 상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동료들이 한잔 하자고 추파를 보내는 것을 속이 거북하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 나오는 길이었다. 운명은 그때 갈림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에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 곤두박질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가까워서 발끝을 세우고 손을 내밀면 별이라도 똑똑 딸 수 있을 것 같은 산동네에다가, 대지 스물 세 평에 건평이 겨우 열 대여섯 평 남짓 되는 허술한 집이지만, 영천댁은 등기부등본상에 이름 석자가 어엿하게 등재된 명실상부한 가옥주다. 그러니까 심호섭 씨는 유별한 남녀가 한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기 위해 밟아야 하는 공식절차를 건너뛴 채 슬그머니 얹혀 지내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반듯하게 식을 올리고 새 출발을 하고 싶어했으나, 심 씨가 이런저런 핑계로 차일피일한다고 매번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런데다 요즘 들어 걸핏하면 외박이었다. 그럴 적마다 넌더리가 난다느니, 오만 정이 떨어진다느니 하면서도 끈질기게 붙어 사는 걸 보면 사람의 정이란 게 산술적으로만 따져서 답을 얻어낼 일이 아닌 모양이다. 때로는 강짜를 부리다가 된통 얻어터져서 볼태구니가 마치 삼립호빵처럼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가 지나면 그 걸로 그만이다. 다음 날이면 교대근무를 하러 나가는 심 씨의 뒤에 바짝 달라붙어 등에 묻은 보풀 같은 것을 손끝으로 떼어주거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골목어귀에 서서 손을 흔들어대는 것을 보노라면 내가 보기에도 가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주위에서는 소갈머리 없는 여편네라며 쑥덕거렸고, 눈을 내리깔며 입천장이 벗겨지도록 혀를 끌끌 찼다. 그런다고 해서 영천댁이 남의 눈치나 실실 보며 사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튼 심 씨 덕분에 식전부터 죄 없는 밥그릇만 요절이 나고 있는 셈이다.
"언니, 또 무슨 일 있어요?"
덜컹하는 문소리가 나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림동 네거리에 있는 벌떼클럽 '과부촌'에 나가는 미스 송이다. 나는 과부촌에는 정말 과부들만 나가는 줄 알았고, 그 많은 과부들이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수돗물처럼 펑펑 쏟아져 나오는가 궁금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난 겨울이었다. 심 씨 생일에 초대를 받아서 함께 아침밥을 먹게 되었는데, 마침 그녀는 과부촌의 실태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 주었던 것이다. 업소에 과부가 더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처녀와 유부녀도 그들 못지않게 섞여 있다고 말했다. 자기를 두고 봐도 그렇지만 누가 과분지 처년지 거죽만 보고 언놈이 어떻게 알겠냐고 덧붙여 가면서 말이다. 나는 암만 보아도 그녀가 어느 한구석 처녀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뜸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는 생각에 꾹 참았다. 취업하는 과정에서 호적등본 같은 거 떼다 바치는 사람도 없는데다, 과부거나 말거나 마지막 남은 몸뚱이마저 미련없이 집어던지는 화류계에서 꼬질꼬질하게 남의 사생활이나 들추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못을 박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늘모 눈을 뜨고서 가만히 듣고 있던 심 씨가 먹던 밥에다 수저를 푹 꽂아넣더니 거기에 덧붙여서 보충설명을 해나갔다. 과부촌이란 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 한물간 바람에 고급주점에서는 먹어주지 않는, 그렇다고 해서 용도폐기를 하기에는 다소 억울한 수준에 처해 있는 여자들을 그러모아 헐값에 제공하는 유흥업소라고 했다. 그래서 호주머니가 헐렁한 사내들이 싼 맛에 자주 놀러 가는 곳이라며, 하층민에게도 부르주아들의 환락을 맛보게 함으로써 계급간의 위화감을 해소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회학적 기능에 덧붙여, 70년대에는 길동과 천호동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해 오다가 마침내 서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는, 역사적 변천 과정과 지역적 분포상황까지 미진한 부분을 조목조목 보완해서 설명해 주었다. 역시 택시노조에서 활약을 했다더니 뭔가 달랐다. 나는 불만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좋은 이름 다 놔두고 '과부촌'이라고 그래요? 그는 측은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흘겼다. 그것도 몰라? 부담스러운 처녀와 임자 있는 유부녀보다는 만만한 과부가 더 시장성이 있다고 본 거겠지. 껍질 벗기고 씨를 추려낸 과일이 바로 과부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요즘 임자 없는 과부가 어딨어?
나는 그의 해박한 식견에 넋을 놓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있던 영천댁이 얼굴을 씰룩이다 못해 울그락 불그락해지는 게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마침내 밥상을 손바닥으로 펑펑 두들겨 대며 퍼부어댔다. 을매나 지랄하고 댕깄으만 어느 것 하나 모리는 것이 없겠노. 과부는 사람도 아이가? 알라들 데꼬 묵꼬 살라꼬 그카는 사람도 있을 끼라. 혼자 사는 것도 서러븐데 과부는 아무 놈이나 집적거려도 되는 물건이냐며 우리들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놓은 것이다. 그게 단초가 되어 졸지에 쌈이 붙고 말았다. 심호섭 씨는 다른 날도 아닌, 하늘같은 서방님 생일 밥상 앞에서 '지랄을 한다'라는 아주 교양이 없고 몰상식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 걷잡을 수 없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 동안 심 씨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성장과정에서 '가정교육을 엄하게 받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교양이 없는 여자가 가장 싫다'고 누누이 말해 왔던 터였다. 교양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 철저한 신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그는 평소 어련무던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여자가 남자를 우습게 다루는 눈치만 보이면 과민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영천댁에게는 심씨의 바람기가, 심씨에게는 영천댁의 교양문제가 언제나 분란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밥상이 뒤엎어졌고, 나야말로 없는 돈에 신사용 3종 양말세트까지 사 들고 갔다가 몇 숟갈 뜨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밖으로 내쫓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미스 송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연달아 영천댁의 가시 돋힌 대꾸가 들려온다.
"뭔 일이 있그나 말그나 니까짓기 와 나서는데? 속 시끄랍으이까네 퍼뜩 문 닫고 잠이나 뒤비자라카이. 가만있으만 될 낀데 나서기를 모할라꼬 나서노?"
"이렇게 시끄러운데 잠을 자겠어요? 아무리 언니가 주인이지만 새벽부터 안면방해를 하면 되겠어요? 나도 자야지 오후에 출근을 할 것 아니에요? 선잠을 깨면 화장이 안 먹어서 얼마나 애를 먹는지 알기나 하세요?"
"아이고 무시라. 그 얼굴에 덕지덕지 찍어 바른다꼬 양귀비 되겠나? 지금이 무신 오밤중도 아인데 미스 송 따문에 발뒤꿈치 들고 대이까?"
"아니 왜 생긴 걸 가지고 트집을 잡아요? 그러는 언니는 얼마나 잘생겼는데 그래?"
"니는 가스나야, 눈구멍은 장식품으로 달고 대이나? 사람들이 내보꼬 김지미 닮았다 카는 소리도 몬 들었나? 냄비나 팔러다이는 니가 하매 사람을 볼 쭈나 알겠나."
"어머머머. 김지미가 무슨 오다가다 교통사고 당했대요?"
"뭐시라꼬?"
"제발 그만하세요. 남자란 매달릴수록 더 멀리 달아나요. 그러려니 하고 모른 척 내버려 둬요. 춤방에서 발바닥 비비고 다니는 것도 한 시절이에요. 밑창 떨어지고 아랫도리에 힘 풀리면 그땐 등 떠밀어도 치마폭에 기어들어 온다니까요."
"그래, 니 잘났다. 젊은 년이 을매나 밑구녕을 돌리고 댕깄으만 남자 속을 저리 훤히 꿰차고 있으까. 내는 이년아, 남이 묵던 숟가락으로는 밥 몬 묵는 사람이라가 그리 몬 한다. 됐나?"
발로 짓밟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양은냄비가 우지끈하며 오그라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동안에 미스 송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참, 저러니 교양 없다는 소리를 듣지."
"뭐시라?"
"됐네요. 치사해서 관 두네요."
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후에 꺼억꺼억 늘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모두 심심하면 울음보를 터뜨리는 체질이라 누가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했지만 미처 밖을 내다보지는 못했다.
우중충한 지하카페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예전에도 두어 차례 들렀지만 올 적마다 낯설고 왠지 기분이 꺼림칙한 곳이다. 바닥에 깔린 마루는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렸고 눅진한 어둠 속에 은밀하게 떠돌던 퀴퀴한 곰팡이 냄새는 기다렸다는 듯이 콧구멍을 찾아 기어들어왔다. 조명이 낮아서 실내는 더욱 음침해 보였다. 조악한 프라스틱 수초가 우거지고, 그 사이로 공기방울이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수족관은 보랏빛 형광램프에 푹 젖어들어 다소 귀기마저 서려보였다. 그 속에는 이역으로부터 멀리 유배당한 팔뚝만한 관상어가 유영을 멈추고, 두고 온 열대의 깊은 강물을 그리는 듯 총기 잃은 눈을 끄먹거리고 있었다. 조리대에서는 유리포트가 김을 뿜어올리며 숨가쁘게 끓고 있었지만 종업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손가락 마디를 하나하나 꺾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상가 분양사기에 말려든 지도 어언 한해가 넘었다. 아파트를 담보해서 융자를 얻고 신용대출까지 뽑아서 홍만식이 짚어주는 대로 선분양을 받았는데 사업자가 부도를 내고 달아나버린 것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듣고서는 차를 몰고 가다가 중앙선을 넘어 정면충돌을 해버린 것처럼 눈앞이 아득했다. 쫓아가서 홍만식을 추궁을 했지만 밭두둑에서 무우를 뽑듯이 흙을 털며 발뺌을 했다. 나중에는 전화를 받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그것은 시행사 책임이어서 분양업자나 건설업자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거였다. 나는 그제서야 사업 주체인 시행사가 있고, 건축과 분양을 하청 받는 회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사전에 그런 위험을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자기도 달아나리라곤 짐작하지 못했을 뿐더러 모든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다는 둥, 시중에 굴러다니는 투자수칙을 열거하며 발을 쭈욱 뻗어버리는 거였다. 어디 친구란 놈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서너 배는 거뜬하게 챙긴다는 홍만식의 달콤한 소리에 넘어간 게 분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카드 할인에 의존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머니에게는 생살이나 다름없는 농토를 팔아서 장만한 아파트인데 느닷없이 내려가서 처분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들이 성공해서 곧 떠나게 될 거라고 동네방네 어깨춤을 추고 다녔을 텐데 천길 나락으로 떠미는 짓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노름질이나 하러 다니며 애꿎은 속을 숯검정으로 만들던 아버지만으로도 당신의 고통은 족할 터였다. 팔팔한 나이에 청상을 만들어놓고 일찌감치 떠나버린 서방에 대한 한을 자식에게 보상 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가운데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아파트를 처분했더라면 꼬리라도 자르고 달아났을 텐데 그마저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은행에서는 경매를 집행하겠다고 을러대고, 카드회사에서는 회사급여를 압류하겠다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서 으름장을 놓았다. 머리통을 움켜쥐고 고민을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뿌리가 썩어가는 나무에 행여나 하고 물을 부어대는 짓을 너무 오래 끌어왔다. 마침내 회사에서는 권고사직을 당했고 개인적으로는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다. 명도소송이 들어오고 퇴거명령을 받게 되자 마땅히 갈 곳조차 없었다. '피해 대책협의회'에 합류해서 목이 쉬도록 성토를 했고, 탄원서를 만들어 관계기관에 접수를 시켜보기도 했지만 가해자가 사라진 마당에 코방귀조차 뀌는 놈이 없었다.
홍만식은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실내용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내려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남자종업원의 머리를 의젓하게 쓰다듬었다. 얼굴은 여전히 피둥피둥했고 식용유를 발라놓은 것처럼 기름져 보였다. 식당에서 건너오는 길인지 그는 혀를 내밀어 불그죽죽한 입 언저리를 한바퀴 쓰윽 감아 돌렸다. 아침부터 굶고 있던 터라 문득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는 혀끝으로 잇새에 낀 음식 찌꺼기를 후비느라 볼을 움씰거렸다. 한참을 그러더니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너도 답답하니까 여길 찾아오겠지만 나도 업무시간에 빠져나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내 입장도 좀 생각하란 말이다. 이건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니까."
"저기, 말이야. 달아난 회장과 너희 사장이 처남 매부지간이라며?"
"그게 뭐 어때서?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너부터 시작해서 모두 친인척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냐. 너희들끼리는 한 집안이라는 말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여기 저기서 한통속이라는 말이 들리더라니까."
그는 그 말을 듣고서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웠다.
"어떤 놈이 그 따위 소리를 해? 사돈의 팔촌이라는 게 나한테 무슨 얼어죽을 친척이야? 우리 사장이 삼촌이랍시고 남몰래 용돈 한번 집어주는 사람이 아니야. 걷어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먹고 살려니까 참고 견디는 거야."
그는 화가 난 얼굴로 한참동안 숨을 몰아쉬더니 턱을 젖히고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을 끈질기게 노려보았다. 내 목소리는 잔뜩 기어들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너희 회사가 부도 난 상가를 통째로 인수한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널 만나면 무슨 소식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들렀는데…."
"그래 봤자야.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 우리 사장도 보증금 걸어놓고 분양권을 딴 거야. 피해자란 말이다. 갑갑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란 이야기야. 본전이라도 찾아볼 생각에 궁여지책으로 인수의사를 밝혔던 모양인데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를 않아. 채권은행이 요구하는 조건이 만만치 않아서 어떻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냔 말이다. 인수를 하겠다면 피해자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먼저 밝히는 게 기업윤리가 아니겠냐."
"그건 우리와는 상관이 없이 끝났다니까. 회장이란 작자가 수배가 내려져 있으니까 잡히기나 기다려 봐. 그런데 내가 보기엔 붙잡아도 헛수고야. 들어보니까 사업 인허가를 내느라고 정치권과 관료한테 먹인 돈이 장난이 아니더라구. 송사리 몇 놈 잡혀 가고 끝날 일이 아니더라니까. 그러더라도 이미 뱃속에 들어가서 똥이 되어버렸을 텐데 어느 놈이 그걸 꾸역꾸역 게워내겠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날파리 떼처럼 머릿속에서만 앵앵거릴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제대로 맘을 먹고 나서주기만 한다면 나 한 사람 쯤은 어떻게 빠져나갈 구제책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애써 비감이 어린 어조로 그의 측은지심에 매달렸다.
"너는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드는지 알기나 하냐?"
내 목소리가 한풀 꺾이는 것을 본 그는 그제서야 꼿꼿이 세웠던 몸을 부드럽게 낮추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힘들겠지. 그런데 방법이 없는 것을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이냐. 이런 실패가 일시적으로 고통스럽겠지만 네게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어. 인생이란 게 장거리 운행이나 다름이 없어. 살다보면 어차피 한두 번은 고장이 나게 되어 있단 말이다. 달리는 자동차도 그렇지만 살아가는 것도 내나 마찬가지야.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점검하는 기회가 된다면 이런 일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점검이라는 것도 그나마 바퀴가 굴러갈 때 이야기지 지금 내 형편은 수리가 불가능한 상태라니까. 이대로 내버려두면 폐차장으로 넘어가게 생겼어. 내 말은 인생이고 뭐고 하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고 얼마라도 돌려 받는 길이 없겠냐는 거다. 힘들면 반에 반이라도 말이야.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서 읍내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빈손털털이다 보니 내려 가보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거든. 저러다 무슨 일 생기면 난 진짜로 죽일 놈이 된단 말이다. 어떻게 좀 봐주라."
그는 코끝에 파리가 붙은 것처럼 얼굴을 털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만하자. 쓸데없는 기대를 하다가는 괜스레 기운만 빠진다니까. 그래도 넌 아직 새파랗게 젊지 않냐. 늘그막에 퇴직금을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도 수두룩하다는 것을 너도 누누이 봐서 잘 알잖냐. 이미 지나간 일에 매달려서 허송세월을 하는 게 아깝지도 않냐. 그게 가장 어리석은 짓이야. 사람은 이게 아니다 싶으면 냉정하게 툭툭 털고 일어날 줄도 알아야 해. 자, 힘을 내라. 그렇게 죽상을 하고 다니면 될 일도 안된단 말이다. 그러다 보면 운이 열리지를 않아서 더 구석으로만 몰리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래, 천천히 마시고 가거라. 난 지금 고객상담 중이어서 더는 지체를 못하겠다."
"저기, 잠깐만."
홍만식은 붙잡힌 손을 빼내더니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서는 성큼 밖으로 나가버렸다. 찾아올 때는 사생결단이라도 할 참이었는데 막상 부딪치니 물먹은 종이처럼 맥이 풀어졌다. 이렇게 헛걸음이나 할 테면 차라리 도배공인 옆집 김 씨를 따라 나가서 몇 푼이라도 버는 게 나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빌어먹을 짓거리란 말인가. 멀쩡한 돈을 떼이고 통사정하는 꼴이라니. 눈을 감고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동안 커피는 차디차게 식어버렸다.
밖을 나서니 빗금을 치며 봄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자대리점에 걸린 '새봄 맞이 초특가 대행진'이라고 적힌 나염 현수막이 바람에 배를 불룩거리다가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덩달아 한기가 몰려들면서 어깨가 후들후들 떨렸다. 전철역은 너무 멀고 행인마저 듬성듬성 지나다니는 이런 곳에 우산장수가 나타날 리도 없다. 나는 난감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여 한 모금을 토해내자 연기는 낱낱이 풀어지며 행길을 따라 달려 나갔다. 공복인 탓인지 벌레가 파먹는 것처럼 위장이 따끔거린다. 맞은편의 낡은 모텔 건물에는 거무죽죽한 구정물이 씻겨 내리고 동굴처럼 뚫린 출입구에 젊은 남녀가 허리를 껴안고서 들어서고 있었다. 물매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웅덩이가 진 길바닥엔 쉴새없이 동심원이 그려졌다. 문득 아버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아버지는 팔뚝이 우람한 목수였다. 대패아가리에서 꽃잎처럼 또르르 말린 대패밥이 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노루발장도리를 들고 대못을 쿵쿵 박는다거나, 먹줄을 탁 튀겨 놓고 양손에 번갈아 침을 뱉고서 톱질을 쓱쓱 해나가노라면 보슬보슬 떨어지는 톱밥을 바라보는 게 참 좋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사판에 나다니는 것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루종일 품을 팔아서 몇 푼 쥐는 짓거리는 사내자식이라면 할 짓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는 틈만 나면 나이 어린 내 손목을 잡아 끌고 읍내로 나갔다. 거기엔 언제나 노름판이 펼쳐 있었고 한바탕 놀다 보면 멱살을 거머쥔 싸움이 나기 일쑤였다.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마치 맹수가 먹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상대가 손쓸 틈도 없이 해치워버렸다. 노름패들은 그런 아버지를 달갑게 여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개가 읍내 장터 사람들이었는데 마지못해 판에 끼어드는 것을 내버려둘 뿐 잘 어울리는 일이 없어서 아버지는 늘 외톨이였다.
여름이었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진구덕이 된 길에서 비틀거렸다. 처음 보는 일이었다. 취하도록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길섶의 논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는질거리는 누런 오물을 몇 차례 뭉텅뭉텅 토해냈다. 아버지는 힘이 드는지 가슴을 움켜쥐기도 했고 속새풀을 쥐어뜯기도 했다. 나는 나란히 주저앉아 개구리밥이 둥둥 떠있는 무논에 해작질하다가 그가 일어서면 따라서 걸었다. 걷다 쉬다 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집에 당도한 아버지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끝내 운명했다.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사복형사들이 다녀간 뒤에도 지서의 순경들은 며칠동안 집에 들락거렸다. 그들은 내게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꼬치꼬치 물어댔지만 나는 한사코 도리질을 했다. 그날 객줏집에서 같이 놀던 사람들이 일일이 불려 다니면서 곤욕을 치렀다지만 그들은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날 한쪽 구석에 박혀 졸고 있던 나는 아버지가 뒷간에 다녀온 사이에 누군가 하얀 가루를 술에 타는 것을 잠결에 언뜻 보았다. 그런데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왠지 모르는 두려움이 내 입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비오는 거리를 쏘다녔다. 사람은 사람의 꽁무니를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앞서 가는 사람을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그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나 또한 사람의 물결에 그럭저럭 떠밀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급전을 알선하는 아주머니가 지하도 앞에서 명함 크기의 안내장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죄 많은 중생들에게 마치 천국행 면죄부라도 나눠주는 것처럼 상냥한 미소를 띠고 정성을 다해 그것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받아든 전단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공중전화를 찾았다. 네, 안녕하세요? 나긋나긋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말이죠. 신용불량자도 대출이 가능하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지금 어디신데요? 일단 한번 들러 주세요. 저기,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이해가 안 돼서 그러거든요. 다들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하지만 염려말고 오세요. 전화로 상담을 하기는 좀 그렇거든요. 오시면 어떻게 해서든지 방법을 찾아드립니다. 망설이지 말고 곧바로 오세요. 언제나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거든요. 종각 아시죠? 영풍문고 쪽으로 나오셔서 청계천 쪽을 보시면…. 나는 그녀의 목을 꽉 조르고 유리박스를 벗어났다.
갈 곳은 여전히 마땅치 않았다. 복권판매소 앞을 기웃거리다가 돈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복이 내게 있었다면 애초에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막다른 곳에서 길이 생긴다고? 행여 사채업자의 뒤통수에 45구경 권총을 들이댄다면 모를 일이다. 돈을 갚지 못해 장기(藏器)매매에 나섰다가 신체검사비용만 뜯기고 말았다는 어떤 사내의 참담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신용불량자가 내다팔 수 있는 것이 몸뚱이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한참을 걷다 보니 낡은 신발은 물에서 막 건진 것처럼 질퍽거렸고, 양말 속의 발가락은 손님이 없어 하루종일 담가놓은 포장마차의 어묵처럼 퉁퉁 불어 있었다.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승백이를 지나 숨가쁘게 상도동 고개를 넘어온 버스에서 등이 떠밀리듯이 내린 나는 지쳐서 뼈마디가 바슬바슬 부서질 것 같았다. 가로수에 등을 기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늘따라 봉천동 산 56번지로 오르는 가풀막이 거대한 절벽처럼 눈앞에 버티고 있는 듯 했다.
비탈길로 오르는 들머리에는 포장마차가 대여섯 줄줄이 늘어서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막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무거운 다리를 끌고 들어와서 칼칼한 목을 축여 가는 곳이다. 나는 습관처럼 천막에 비치는 그림자를 살핀다. 달리 단골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북적거리는 게 싫어서 가장 한산한 곳을 찾아 들었다. 그런데 마침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심 씨가 문득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쳤으니 달아날 수도 없다. 그는 나무 의자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겼고 나는 어정쩡하게 곁에 가서 걸터앉았다.
"비 오는데 어디 갔다 오는 겨?"
그는 살대가 부러져서 너덜너덜한 비닐우산을 한심하다는 듯이 흘겨보더니 잔을 넘겼다. 눈이 개개풀어진 게 많이 취해 보였다. 그는 갑자기 밀가루 포대를 터는 것처럼 웃음을 허공에다 풀풀 날렸다. 그러더니 손을 내저었다.
"하긴 그딴 걸 왜 묻는지 모르겠다. 우리 같은 날품팔이가 어딜 갔다 오면 뭐하겠어?"
"오늘 일 안 나가셨어요?"
그는 콧등을 찡그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비번이야. 어서 마시기나 해."
그러고 보니 비가 오는데도 백구두를 신고 있다. 그가 백구두를 신는 날은 어김없이 쉬는 날이다.
"아주머니가 많이 기다리시는 것 같던데요. 일찍 들어가시지는요."
그는 뱃속에 든 바람을 빼내려는 것처럼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지금 집에 들렀다 내려오는 길이야."
그리고서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내내 말이 없다. 시켜놓은 제육볶음은 식어서 찐득찐득했다. 가끔 바람이 천막을 부풀리고 나면 빗소리가 후드득 거세어지곤 했다. 구레나룻이 거뭇거뭇해서 그런지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그동안 살면서 정깨나 들었는데 잘 지내. 나는 지금 여길 떠나는 길이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더 이상 영천댁을 속일 수가 없더라구. 사실 난 두집살림을 하고 있었거든. 그게 말이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더라구. 여간 힘든 일이 아니야. 가랑이가 찢어지게 생겼더란 말씀이야. 오늘 만나서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그만 끝내자고 이야기를 했지. 한바탕 난리 굿을 할 줄 알았는데 싱겁게도 고분고분하더라니까. 여자들은 누구한테나 그런 모진 구석이 있나 봐."
나는 키득거리는 그를 흘긋 노려보았다. 정말 생긴 꼴값을 단단히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뻔뻔한 그 얼굴에 귀싸대기라도 올려붙이고 싶었다. 그는 낌새를 알아챘는지 그러고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실내엔 솥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만이 자오록했고 주인 아주머니도 엿듣기가 민망한 듯 돌아앉아 있었다. 잠깐 멈칫했던 빗소리는 냄비에 들깨를 볶는 것처럼 세차게 토닥거렸다. 우리는 장기알을 놓듯이 술잔을 비우는 대로 툭툭 주고 받았다. 내가 몇 마디 던져 보았지만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고 나는 불현듯 가슴이 답답해 왔다. 때로는 억척스럽고 뚝별난 영천댁이 마뜩하지 않기도 했지만 어떻든 심 씨 뒷바라지 만큼은 빈틈없이 해왔다.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떠나면 그만인가.
"난 그만 갈래. 혼자 더 마시고 올라가."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서 만 원자리 지폐를 두 장 던져놓더니 기우뚱하며 일어섰다. 나는 그가 휘장막을 들추고 밖으로 나서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룻밤만 나타나지 않아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가슴을 움켜쥐고 고꾸라지던 그녀는, 지금 그 가슴에다 벌건 장작불을 싸지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조바심을 견디지 못해 불쑥 일어섰다. 저만치 휘뚝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뒤를 쫓아가서 팔을 낚아챘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는 피곤한 듯 힘들게 이마를 끌어올렸다.
"뭐가?"
"아저씨, 이러면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아줌마는 고무장갑이 빵구가 나면 그걸 버리지 못하고 고무줄로 꽁꽁 묶어서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눈을 흡뜨고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쉐타 한 벌로 겨울을 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운전하는 게 골병 드는 짓이라고 몇십만 원짜리 보약을 달여 먹입디다. 아저씨가 사람입니까.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저렇게 놔두고 가면 영천댁 아줌마, 제 꼬라지 못 이겨서 죽습니다."
그는 전봇대에 등을 기댄 채 파고드는 내 가슴을 떠밀어냈다.
"비켜. 자네 취했어. 쓸데없는 참견하지 말고 어서 올라가라니까."
"이대로는 못 갑니다."
"못 가면? 나도 힘들고 피곤해. 이거 이러지 말라니까."
"이번에는 또 어떤 여잡니까? 어디서 교양이 철철 넘쳐 흐르는 여자를 건지기라도 했습니까?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제발 그만하라면. 자네는 아직 인생을 말할 나이가 아니야. 세상을 한참 더 살아야 인생을 말할 수 있어. 사람이 사람을 떠나갈 때는 구질구질하게 긴 말을 남기는 게 아니야. 그냥 조용히 가게 내버려 둬."
"뭐요? 당신이 그렇게 잘났습니까? 이대로는 못 갑니다. 죽이든 살리든 올라가서 해결을 하고 가란 말입니다."
나는 그의 잘난 상판대기를 가칠한 블록 담에 박박 긁어서라도 망쳐놓고 싶었다. 저 잘난 얼굴을 구겨놓아서 그의 바람기가 멈출 수 있다면, 그래서 영천댁과 어깨를 부닥치며 알콩달콩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까짓 거 열 번이라도 못할 게 없었다.
"허어, 왜 이럴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나서지 말라니까."
"상관이 없다니요. 나도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입니다. 가족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줌마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뭐가 불쌍해? 이 세상에는 더 불쌍한 사람이 까마득하게 널려 있어. 오늘 내일 죽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도 천지야. 영천댁은 궁상을 떠니까 저렇게 살아가는 거야. 왜 입을 것 못 입고, 먹을 거 참아가면서 사느냔 말이야. 그래서 누가 알아주더래? 쭈굴탱이 할망구 되면 그 돈을 덮고 뒈질 거냔 말이야. 그것도 다 그 여편네 팔자소관이야. 운명은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거야. 가거든 남자한테 보약 갖다 바칠 정성이 있으면 제 몸단장이나 잘하라고 그래. 그러면 얼마든지 좋은 놈 만날 수 있어."
나는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는 심 씨의 멱살을 있는 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그가 들고 있던 우산이 땅바닥으로 핑그르 나뒹굴었다.
"뭐라구요? 그래서 아줌마가 흥청망청 돈을 쓰지 않는다고 걷어차고 달아나는 겁니까? 어떤 년들처럼 낯바닥에 뺑끼칠 하지 않는다고 버리고 가는 겁니까? 이 세상에 제일 나쁜 놈이 누구냐면요, 당신처럼 사람 눈에 피눈물 뽑는 놈입니다."
밀고 당기며 실랑이질을 하다가 중심을 잃고 함께 쓰러졌다. 우리는 진창이 된 길바닥에서 한데 엉킨 채로 꿈틀거렸다. 한참을 뒹굴다 보니 온몸을 흙탕물로 뒤발했다. 나는 끝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발모가지라도 툭 분질러 놓고 싶었다. 마침 신고 있는 백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물걸레로 닦기만 해도 곧장 광이 반짝반짝 난다고 자랑하던 에나멜 구두를 억지로 벗겨서 남의 집 담벼락 너머로 훌쩍 던져 버렸다. 그렇잖아도 몰래 시궁창에 쑤셔넣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경광등을 반짝이며 큰길을 달려오던 119 구급대 차량이 넘어질 듯이 비탈을 향해 꺾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우리는 그 순간 서로 질린 낯짝을 마주보았고 일시에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눈이 두려움에 녹아들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산동네를 향해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우리가 달려갔을 때는 축 늘어진 영천댁이 주황색 제복을 입은 건장한 소방대원의 등에 업혀 대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치마 밑으로 흘러내린 하얀 두 다리는 힘없이 대롱거렸다. 미스 송이 발을 동동 굴렸다. 비가 와서 손님이 들지 않는데다 생리통이 심해서 일찌감치 들어오고 싶더란다. 아침에 티격태격했던 게 마음에 걸려서 영천댁이 좋아하는 강냉이튀밥을 한 보퉁이 보듬고 들어왔는데, 하며 몹시 서글픈 얼굴로 손톱을 자근자근 물어뜯었다. 급기야 그녀의 눈에서는 먹물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병원으로 옮겨온 우리는 응급실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였고, 복도 끄트머리엔 가까스로 엉덩이를 의자에 걸친 심 씨가 얼굴을 무릎에 처박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신발이 달아난 한쪽 발은 양말이 반쯤 벗겨져서 혓바닥처럼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죽지는 않을 것 같다니까 그만 가보세요. 깨어나서 얼굴을 보면 더 힘들어 할 겁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는데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마세요. 많이 산다고 인생을 많이 아는 겁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인생입니다. 봉천동 백구두라 그러면 소갈머리없는 아줌마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환장을 한다는 소리를 나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순진한 영천댁 아줌마는 집 팔아서 당신 개인택시 장만해 주겠다고 글더랍니다. 캄캄한 새벽에 눈을 제대로 못 뜨고 교대근무 나가는 게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프더랍니다. 아시겠어요? 미스 송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내가 지금 거짓말하는 거 같습니까. 잘 가세요. 가는 건 좋은데 두고두고 당신 나쁜 놈이라고 욕할 겁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벽으로 몸을 기댔다. 그러더니 멍한 눈빛으로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내 말 좀 들어 볼래? 으흐흐, 이거 굉장히 쪽 팔리는 얘긴데, 나한테 말이야. 나를 버리고 내뺀 여편네가 있었어. 한때, 그 여자를 미워하면서 살았지. 미친놈처럼 이 여자 저 여자를 갈아치우면서 마누라에 대한 적개심으로 살아왔어. 아무려면 춤만 췄을까. 미친 짓은 다해 보았을 걸. 이 세상에 믿을 년이 없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러다가 영천댁을 만난 거야. 다르더라구. 사람이 달라. 괜찮은 여자라는 거 내가 왜 모르겠나. 내가 바보는 아니거든. 정말 마음 잡고 야무지게 살아보고 싶었어. 근데 말이야, 웃기는 일이 벌어졌어. 갑자기 그 여자가 돌아온 거야. 할머니한테 맡겨둔 내 아이들은 멋도 모르고 좋아서 숨이 꼴딱 넘어가더라구. 그렇지만 난 받아들이지 않았어. 얼굴에 침이라도 카악 뱉어주고 싶었으니까. 정말이라니까. 내가 쓸개도 없는 놈은 아니잖아. 설마허니 다른 놈하고 붙어먹은 여자를 내가 받아들이겠냔 말이야. 근데 말이야. 상판대기를 보니까 반송장이 다 됐더라구. 그러면 그렇지. 오즉하면 왔겠어. 알고 보니 그 빌어먹을 년이 죽을 병을 얻어서 돌아왔더라구, 으흐흐, 정말 웃기는 년 아니야? 씨발, 자식까지 버리고 갔으면 환장하도록 잘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야. 근데도 말이지, 나는 그걸 끝까지 모른 체 할 수가 없더라니까. 싫은데도 질질 끌려가는 거야. 나중에는 살릴 수 있는 데까지는 살려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더란 말씀이야. 병원에 집어넣었는데 간병인이 없다 보니 내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어. 영천댁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방방 뛰는데 그 이야기를 도저히 꺼낼 수가 없더라구. 그러니 씨발, 내가 어떻게 해야 쓰겠어. 영천댁보고 그 여자가 죽을 때까지 좀 기다려 달라고 그럴까? 그렇게 뻔뻔할 자신도 없지만 말해본들 그게 씨알이나 먹히겠냐구. 그렇다면 내가 가야지. 가지 않고 내가 어떻게 배겨낼 수 있겠어. 안 그래? 그래서 좋은 여자가 생겼다고 그랬어. 끝낼 거면 확실하게 끝내줘야지. 미워하는 게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거든. 그런데 오그라질,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그는 어금니를 앙다물었지만 잇새로 빠져나오는 신음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나는 현관을 빠져나와서 심호흡을 했다. 비는 여전히 사선으로 쏟아져 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앙상한 나무들의 표피가 외등의 불빛에 반들거렸다. 허튼 짓 하는 꼴을 보지 못하고 곧이곧대로만 살아온 영천댁이 이제 와서 심 씨의 처지를 웅숭깊게 보살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뭘까.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시작한다. 알고보면 그게 탈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늘 안절부절 못하고 가슴을 태운다.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도 인간이 안고 있는 원초적인 결핍을 채우기 위한 갈증이거나 허기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외화된 욕망이어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지만 빗물에 젖어 쓸만한 게 없었다. 우멍하게 입을 벌린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입원실 병동이 소등을 하자 병원은 적막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빗길 교통사고 환자가 앰뷸런스에 실려오면서 야간 응급실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뒷문이 열리며 토하듯이 빠져나온 들것에는 피투성이가 된 환자가 혼수상태로 누워있었다. 그 사람도 아침에는 가족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을 것이다.
남편 복 없는 년이 무슨 복에 자식 덕을 보랴, 어머니는 내가 속을 썩이기라도 하면 가슴을 툭툭 치며 그렇게 푸념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왔고 내가 행여라도 그를 닮아가는 눈치라도 보이면 길길이 뛰었다. 그래서 난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그런데도 아버지는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었다. 아버지 또한 나처럼 이 사회에 제대로 편입을 하지 못한 소외자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껏 아버지로부터 도피하고자 무던히도 애썼다. 그의 삶을 비난했고 그의 죽음을 묵인했다. 그런 다음에 힐난이 두려워 끊임없이 방어기제를 만들며 갈등으로부터 달아났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내가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적극적으로 부딪쳤고 나는 소극적으로 피해왔다는 차이 뿐이다. 내 육신의 반 토막은 그의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에게서 달아나는 것은 결국 내게서 달아나려는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혈연이란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그물이었다. 아무리 달아나도 나는 제자리를 뛰고 있었다. 아버지라면 이처럼 부당한 일을 당하고서 청승맞게 쏟아지는 빗물이나 바라보고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천적은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동종 포식성을 지닌 인간의 잔인한 생리를 애써 모른 체 하고 살아왔다.
들이치는 비바람이 발부리를 적셔왔다. 후줄근한 내 모습에 견딜 수 없는 짜증이 돋았다. 이건 아니야. 이러려고 외줄을 타는 것처럼 잔뜩 몸을 사리며 살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꿈을 꿀 때마다 수없이 홍만식의 목을 졸라 죽였고, 현장을 빠져나온 나는 외진 골목으로 달아나다가 덜미가 붙잡혀 가위가 눌리곤 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그를 죽일 지도 모른다. 벼랑 끝에서 죽거나 죽여버리거나 말고 다른 무엇을 내가 선택할 수 있겠는가. 내가 널 죽일 지도 모르니까 무언가 방법을 찾아보라고 사정을 해보면 어떨까. 누구라도 죽는 건 싫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내가 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믿게끔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문제였다. 보나마나 그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거나 비웃고 말 것이다. 놈은 나를 아주 숙맥(菽麥)으로 보고 있다. 그를 죽인다는 것은 곧 나를 죽이는 것이다. 죽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널 죽일 수 있다니까. 난 널 죽일 수 있단 말이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목이 트이질 않았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돌아보니 미스 송이다.
"응급처치가 끝났대요."
"깨어났어요?"
"아직요. 아저씨가 지키겠대요. 별일 없을 거니까 우리보고 먼저 들어가라는데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할래요?"
그녀는 먼저 빗속으로 성큼 뛰어들었다. 나는 끌려가듯이 뒤를 따랐다. 흙이 묻은 채로 구덕구덕 말라가던 옷은 다시 축축하게 젖어갔다. 우리는 네거리를 건넜고 골목을 한참을 걸어가다가 겨우 허름한 뼈다귀 감자탕 집을 만났다. 손님은 아무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녀는 통이 좁은 치마를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끄집어 올리더니 무너지듯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눈가에 그림자가 짙고 화장이 지워진 얼굴에는 기미가 드러나 있어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녀는 미처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강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더니 고통스러운 얼굴로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많이 아파요?"
"괜찮아요. 다 아는 병인 걸요, 뭐."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뜸 물었다.
"애인, 그런 거 없어요?"
나는 그녀의 몽롱한 눈빛을 피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던가요? 술집 나가는 여자라서요? 웃음은 팔았지만 몸을 팔지는 않았어요. 나도 한때는 괜찮은 여자였다니까요. 내가 오늘 한번 당신을 유혹해 볼까요?"
그녀는 술잔을 머금고 관능적으로 웃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나를 보더니 그녀는 마침내 허리를 접어가며 키득키득 웃었다.
"겁 먹지 말아요. 괜히 해본 소리예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고 골치가 아픈 놈이거든요. 내가 봐도 참으로 한심합니다. 몰라서 그렇지 숨을 쉬고 있는 게 신통할 지경입니다."
"알아요. 그렇게 둘러대지 않아도 돼요. 좋은 여자 만나야지요. 나, 실은 임자 있는 어엿한 유부녀예요. 왜 빤히 쳐다봐요? 무엇 때문에 그런 델 나가느냐구요?"
유리창엔 빗물이 달라붙었다간 제풀에 겨워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기름먼지가 낀 환풍기는 역풍을 타고 빙빙 헛돌고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술집에 나간다는, 그런 변명 같은 건 치사해요. 입에 풀칠을 할 거면 구정물에 손을 담근들 해결이 안 되겠어요? 돈 같은 거 소용없어요.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몸이 아파서 여러 날 일을 나가지 못하자 머리를 짧게 깎은 우락부락한 청년들이 찾아와서 쌍욕을 퍼붓고 갔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그녀는 빚을 끌어안고 있었고, 버는 대로 브래지어 속에 쑤셔 넣어둔 돈을 대충 손바닥으로 펴서, 목도장을 꾹꾹 눌러주는 일수쟁이에게 갖다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난 그게 아니에요. 내게 무슨 돈이 얼마나 필요하겠어요? 난 어서 빨리 시간을 보내야 해요. 내게 주어진 터무니없이 길고 지루한 시간들을 어떡하든지 흘려보내야 하거든요. 그게 정말 견디기가 힘들어요."
"시간요? 시간은 우리완 상관없이 그냥 저대로 흘러가는 게 아닙니까."
"천만에요. 사람마다 시간의 길이가 달라요."
그녀는 시간이란 게 마치 입는 옷처럼 각기 치수와 기장이 다른 것처럼 말했다. 그렇더라도 시간의 치수가 푼더분한 게 불안하게 쫓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시간이 남아 도는 사람들이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녀를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댔고 나는 어색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더욱 침울해졌다. 고작 위로한다고 내뱉은 말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요. 나 같은 사람은 시간이 남아 돌거든요. 시간을 잔칫집 시루떡처럼 뚝뚝 떼어서 여기저기 나눠줄 수 있다면 참 좋겠네요."
그녀는 한눈을 팔듯이 실내를 휘둘러 보았다. 입술을 깨물고 빛 바랜 천장에 들러붙은 형광등을 한참동안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던 그녀는, 남편이 살인을 하는 바람에 무기수로 복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힘들게 털어놓았다. 차라리 버림 받은 영천댁이 부럽다고 말했다. 과부 아닌 과부로 살아가는 게 이제는 지겹다고 끝내 울먹였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는 남편에게 받았다는 피빛 루비반지가 그녀의 눈물처럼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는 몇 잔의 술에 후들후들 풀어지더니 몸을 가누지 못했다. 탁자에 엎드린 채 쓰러진 그녀를 깨우다 못해 들쳐 업었다. 옷은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었고 그녀의 젖가슴이 등을 압박하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이내 무감각해 졌다. 포장마차는 이미 장사를 끝내고 죄인처럼 동바에 친친 묶인 채 토닥토닥 비를 맞고 있었다. 새털처럼 가벼운 그녀를 등에 업고 봉천동 비탈길을 싸목싸목 올라갔다. 문득 풀려있던 그녀의 두 손이 목덜미를 감아왔다.
"나를 좀 어떻게 해줘 봐."
그녀가 신음소리처럼 뇌까렸다. 그녀는 지쳤고 흔들리고 있다. 손에 몇 푼의 돈을 쥐어주고 다급하게 바지를 끄집어올리며 떠나가는 남자들의 욕정만으로는 해갈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인간은 늘 외롭고, 그래서 사람에게 기대어 견디기 힘든 그 외로움을 덜어내곤 한다. 그러나 말이지, 인간이 만들어준 행복은 어차피 그 너비만큼 여백으로 남는다는 것을 미스 송이 알았으면 좋겠다. 사람을 통해 사람이 만든 고독을 지워내지 못한다. 그것 만큼은 날고 긴다는 봉천동 백구두도 어쩔 수 없지 않았는가. 어쩌면 창백한 탐조등 불빛이 소리없이 교도소 담벼락을 훑어대는 이 시간 그녀의 남편도 잠이 깨어 묵묵히 빗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고개를 들었다. 아, 다 왔구나. 저기 희멀건 가로등이 서있는 곳까지만 올라가면 된다. 점점 무릎이 풀리고 숨이 차 올랐지만 마지막 안간힘을 냈다. 비가 개이고 날이 밝으면 우리는 또 쫓기듯이 살아갈 것이다. 나는 하릴없이 홍만식을 찾아다닐 것이고, 심 씨는 운전대에 앉아 핸들을 감아 돌릴 것이며, 미스 송은 거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붕어처럼 빠끔거리며 입술을 그릴 것이다.
<끝> 2003. 06 mas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