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다.
내 기억에 해마다 4월 초파일은 날씨가 좋았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비교해 볼 때
예수님은 추운 겨울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데 반해
부처님은 따뜻한 봄날 궁중에서 태어나셨다는 것.
태어나신 상태야 어떻든 두분 모두 우리 인류에게 진리의 복음을 남겨주신
위대한 성인들로써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 까지도 우리의 생활
깊숙히 들어와 인류의 정신과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분들이시다.
오늘 나는 우연히 고양에 위치한 한 절에 들러
무료 식사를 공양받고 보답으로 시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비타불~~
<초파일에 한번 읽어보는 부처님의 일생>======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부처님의 탄생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 인도국경과 네팔에 걸쳐 자리잡고 있었다는 카필라왕국에서 슛도다나 왕(정반왕)과 그의 부인 마야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은 고타마(Go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였다.
불타(佛陀)란 붓다(Buddha)의 음역으로 ‘깨친 사람(覺者)’이란 뜻이며 부처님이란 말도 같은 뜻을 가진다. 그는 석가족(Sakya족) 출신이었으므로, '석가모니'란 ‘석가족출신의 성자’란 뜻 혹은 ‘석가족 출신의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란 뜻을 가진다.
불전에 의하면 그는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에 속하는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탄생게(誕生偈)'외쳤다고 한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있으니 내 이를 평안케 하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吾堂安之)
탄생게로 불리는 이 외침은 실제 있었던 일의 기록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일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던가? 첫째로는 인간의 성품이 하늘 위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일깨우기 위해서 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홀로 높은 나(我)'는 개체적인 '나'가 아니라 인간의 본래 성품, 참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나'의 실현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까닭이다. 둘째는 고통속에 있는 세계,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의 삶을 그리는 신앙인의 눈에는 적어도 그 두 가지를 위해 오셨던 분이 부처님이셨다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처음으로 그런 외침을 하셨다고 한 것이다.
태자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7일만에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 당시 석가족 남자성은 '고타마'이고, 태자의 이름은 '싯타르타'라고 지었는데, 그래서, 부처님의 어릴 적 성과 이름은 ' 고타마 싯타르타 '로 이는 '모든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왕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한 히말라야의 예언가인 아시타(Asita)선인을 불러 점치게 하니 아이의 장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왕자는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도를 닦으면 깨달음의 궁극에 이를 것입니다. 이 아이는 최상의 청정을 볼 것이며, 맡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법륜을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은 널리 퍼질 것입니다." 라며 자신은 나이가 많아 그 때를 지켜 볼 수 없어서 못내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다.
태자는 계모가 되는 마야 왕비의 친동생 즉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rajapati)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여덟 살이 되자 왕은 태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할 태자로서의 수업을 받게 하였다. 이 제왕의 수업에서 태자는 칼과 창을 다루는 무술과 씨름을 익히고, 코끼리와 말을 타는 방법, 마차를 다루는 방법, 병사를 움직이는 병법을 익혔고, 문법 천문지리에도 능통하여 가르치는 스승을 기쁘게 하였다.
날이 갈수록 태자의 훌륭한 용모와 기개로 주위에 찬탄을 받았다. 더욱이 싯다르타 태자의 궁중생활은 물질적으로 풍요로 왔다. 궁전에는 연못이 있었고 청, 흥, 백색 연화가 피어있었다. 향이나 의류는 카시산(産)이 사용되었다. 또 겨울, 여름, 우기 의 세 계절에 적합한 세 궁전이 마련되고 여인들과 음악에 둘러싸인 유복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태자의 젊은 시절은 남달리 자기 반성적인 사색의 생활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우아한 생활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섬세하고 민감한 감정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며 이와 아울러 세상에 대한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남다른 번민을 하였던 것이다. '사문유관'으로 묘사되는 설화는 바로 태자가 고심하였던 그 원초적인 의문을 구상화시킨 예이다.
태자의 고뇌(苦惱)
태자는 어느 날 봄 임금인 정반왕을 따라 춘경제(春耕祭)에 첨석한 일이 있다. 그는 나무 아래에서 멀리 보이는 경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농부는 밭이랑을 고르고 있었고 아름다운 산새들의 지저귐이 귓가에 따가왔다. 그때 태자의 눈에 띄인 것은 벌레의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농부의 연장에 찍혀 아직 숨이 꿀어지지 않은 채 몸부림치며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참새가 날아들어 그 벌레를 입에 채어 창공을 나른다. 그것도 일순간 또 큰 독수리가 달려들어 그 참새를 덮쳐서는 어리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일순 태자는 형언할 길 없는 연민의 감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보이던 이 자연에는 생존경쟁, 약육강식 등 냉혹한 현실이 있었다. 강자에 의해 짓밟혀야 하는 약자의 숙명을 그는 다소곳이 체념할 수많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농부의 채찍에 시달린 여윈 소, 허위적 거리며 끊임없는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생명의 실상이 측은히 여겨지게 되었다.
농부의 손은 거치른 일 때문에 부르텄고, 그의 이마는 태양에 그을린 채 깊은 고뇌의 주름을 보이고 있었다. '어째서 생명 있는 것들은 서로를 학대해야 하는가?, 끝없는 고통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비로서 태자는 큰 나무아래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다.
* 큰 나무아래에서 사색에 잠긴 것을 이를 일러 "염부수(閻浮樹) 아래의 정관(靜觀)"이라 한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세속의 부귀영화는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행복한 듯 보이는 현실의 허상에 그는 끝내 안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생명들이 당하는 고통은 태자에게 있어서는 곧 자신의 슬픔인 양 느껴졌다. 그는 끝없는 자비의 상념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괴로운 생존들을 진실한 행복의 길로 인도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싯다르타 태자는 명상으로 맡은 시간을 보냈다. 홀로의 시간을 즐기며, 그 명상속에서 풀려질 듯한 생각의 매듭 매듭에 잠기곤 하였다. 부왕은 늘 그 점이 염려스러웠고, 혹시 아시타 선인의 예언 대로 출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어느날 태자는 성문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생활을 구경하게 되었다. 동문(東門)에서는 백발의 허리가 굽은 노인(老)을 보고는 인간은 누구나 저렇게 늙는구나를 알았고, 남문(南門)에서는 고통에 신음하는 병자(病)를 보고 병에 시달리는 인생의 괴로움을 알았고, 서문(西門)에서는 죽은 사람(死)의 장사행렬을 보고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통절히 느꼈다.
그러나, 북문(北門)에서는 출가 수행자를 만나 생노병사의 고(苦)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탈의 길이 있음을 듣고 기뻐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 이를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한다.
싯다르타가 열 아흡 살이 되자 부왕은 서둘러 태자비를 물색하기로 했다. 태자는 결혼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부왕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한편 부왕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가문 좋고 아름답고 슬기로운 규수를 물색한 끝에 같은 석가족 콜리성 공주인 야쇼다라를 태자비로 정했지만 싯다르타에게는 결혼이라는 것이 남의 일 같아서 좀처럼 실감이 들지 않았다.
태자는 야쇼다라(Yashodara)비 사이에서 라훌라(Rahula)라는 아들을 얻었다.
숫도다나왕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곧 분부를 내려 큰 잔치를 베풀고 왕손의 탄생을 축하하도록 했다. 그런데 정작 이 경사를 기뻐해야 할 싯다르타는 이날 따라 그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무렵에야 그는 궁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도 숲속에 들어가 온종일 혼자 명상에 잠기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궁전 안에 이르러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즐거워하는 광경을 보자 비로소 궁중에 경사가 일어난 줄을 알았다. 자기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아, 장애(Rahula)로구나"라고 탄식한 말이 그대로 어린아이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아들이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라훌라(장애)'라고 탄식했지만 이제야말로 기회가 왔다고 결심했다. 그의 마음은 벌써 히말라야의 산록, 정처없는 구도자들의 손짓 속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 있었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고, 나이 들어서는 아름다운 야쇼다라 공주를 비로 맞았으며 라훌라라는 아들까지 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총명과 사색적인 천품을 타고난 그는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하여 늙고 병들고 급기야 죽어야 하는 한계 지워진 상황 속에 던져진 자신이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드디어 나고 죽는 문제, 늙고 병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구도의 길을 택하였다. 그 길은 일체를 버리고 혼자 가는 외로운 출가의 길이었다. 스물 아홉(29세)에 그는 성을 떠나 출가사문이 되었다.
오랜 번민의 나날이 흘러간 어느 날 밤 태자는 드디어 출가를 결심하였다. 그것은 물론 인도의 오랜 관습을 따른 행동이었다. 인도인들은 고대에 있어서 늘 출가를 이상으로 삼아왔다. 교육을 받고 가업을 계승하는 생활은 노년에 들어서면 반드시 청산하였다. 자신의 가업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부부는 히말라야의 숲속에서 명상을 즐겼다. 이윽고 내외마저도 헤어져서 서로서로 해탈의 경지를 찾기 위해 살아가곤 하였다.
마침내 어느 날 밤,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토록 법석이던 지난밤의 궁중은 적막했다. 드넓은 대청마루에서는 지난밤 노래하고 춤추던 궁녀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자고 있었다. 어떤 궁녀는 이를 갈면서 자는가 하면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리는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궁녀는 이불을 걷어차 버리고 추한 모양으로 자고 있었다. 피로에 지쳐 곯아떨어진 궁녀들의 몰골은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 광경을 본 싯다르타는 그들이 가없었다. 또한 인간의 꾸밈없는 모습을 거기서 본 듯했다.
태자는 이윽고 야쇼다아라가 잠든 침실로 갔다. 어쩌면 다시 못보게 될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단 하나의 핏줄인 아들 라훌라를 고즈넉히 바라보는 태자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내가 큰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다시 고향 땅을 밟지 않으리라' 밖은 달이 낮과 같이 밝았다. 태자는 맑은 바깥 공기에 심호흡하고서 허공에 대고 힘주어 말하였다. 태자는 마부 찬다카(Chandaka)를 불렀다. 찬다카는 민첩하고 날렵한 왕실의 우두머리 마부(수렛군)이었다.
"나의 애마 칸타카를 끌어다 주게! 영원한 행복을 구하기 위해 출가를 단행하려 집을 나가기로 했네. 찬다카! 나는 지금 깊은 기쁨을 맛보고 있어. 어떤 강력한 힘이 내 마음을 지켜 주고 있는 듯하네. 난 혼자 떠나지만 무엇인가 지켜주는 한 보호자가 있는 것 같아. 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좋은 기분이야. 자, 시간이 됐다. 나는 길에 오른다. 구원으로 가는 길에. 해탈로 가는 길에.....?
찬다카는 슷도다나 왕의 엄중한 명령을 생각했다. 태자에게 말을 내어주어서는 아니 되리라. 하지만, 태자의 그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을 보고서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태자의 말 칸다카를 끌어왔다. 태자는 칸타카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고상하다! 아름답다! 칸타카, 나의 길에 동반해 다오. 이 밤 나는 길을 떠난다. 너의 도움을 다오. 이 길은 외롭고 험하다. 쾌락의 길에는 많은 이들이 기꺼이 따라간다. 그러나, 진리와 지혜를 찾으려가는 길에는 한 사람의 동반자도 따라가 주지 않는 법. 왜냐하면, 그 길에는 쾌락과 즐거움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칸타카! 너의 힘을 빌려다오. 너의 빠른 발을 빌려다오. 세상은 외롭고 험한 이 길의 동반자인 너의 이름을 길이 기억하리라. 그리고 나는 너의 덕으로 부처가 되어 인간과 하늘 세계에 있는 중생들을 다 구제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자는 마치 친구에게 하듯 말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말 잔등에 올라 앉았다. 밤은 고요하고 드맑았다. 칸타카는 태자의 속 마음을 안 듯이 발소리를 죽이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싯다르타는 성을 벗어나자 길을 재촉해 말발굽 소리만이 밤하늘에 울려 펴졌다. 그는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로부터 떠나고 있었다. 점점 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숲에서 밤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을 뿐 태자와 찬다칸는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아누피야 고을을 흐르는 아노마강을 건너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새벽의 맑은 강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왔다. 싯다르타는 말에서 내렸다. 허리의 칼을 들어 번뇌와 미흑을 끊어내듯 스스로 머리를 깎고 깨끗한 강물에 씻었다. 찬다카는 눈물을 흘리며 그 모양을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싯다르타는 몸에 지녔던 패물을 찬다카에게 내주며 말했다.
"찬다카여! 이것을 부왕께 가져다 드리고 나의 말씀을 전해다오. 세속에 대한 욕망은 없으며, 다만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길을 가노라고 말씀드려라" 그리고 다른 패물을 주면서 이런 부탁도 했다. "
이것은 이모님과 야쇼다라에게 전하여라, 내가 출가사문이 된 것은 세속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와 자비의 길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해다오."
그때 마침 사냥꾼이 그들 곁을 지나갔다. 태자는 호화로운 옷을 벗어서 사냥꾼에게 주고 사냥꾼의 거칠고 해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깎고 다 해진 옷을 걸친 싯다르타의 모양은 누가 보아도 도를 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이렇게 성을 넘어 출가한 것을 "유성출가(踰城出家)"라고 한다.
부처님의 고행(苦行)
태자는 약 6년간에 걸친 고행을 시작하였다. 팔리(pali) 불전의 기록에 따르면 태자는 첫 1년 동안 갠지스강 유역의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면서 스승을 찾아 헤매였다고 한다.
빔비사라왕을 만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빔비사라왕은 고귀한 싯다르타의 모습을 대하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자기 나라의 대신으로 삼아 볼 생각도 하였으나 태자 굳은 결의를 보고는 못내 아쉬워하며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부디 대각을 얻으신 후에는 나와 백성들을 위하여 가르침을 펴시라.'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한 지 2년째 되던 해부터 갖가지 고행의 수련을 쌓기 시작하였다. 첫번째 찾아간 수행자는 "박가바"라는 고행주의자였다. 그들의 극한적 고행을 보고 내심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 고행의 목적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에 있음을 알고 이에 만족치 못하고, 두번째로 간 곳은 그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갠지스강을 마가다국 라자그하라(왕사성)의 바이샤알리(Vaisali: 빈다산)에 있는 히란야밧티(Hiranyavali,현재는 Gantak라고함) 강가였다. 그 곳에는 유명한 요가의 스승들 수행주의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 두 선인이 삼백명의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싯다르타도 그 일행으로 함께 수도하였고, 곧 스승에 의해 큰그릇임을 인정받았다. 태자는 스승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사양하고 수도처를 옯겼다. 그는 오랜 수련으로 여러 가지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오랜 단식을 할 수 있다든지, 또는 호흡을 정지할 수 있다든지 하는 요가의 기교에 숙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부산물일 따름이었다. 그는 여전히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는 비밀을 알지도 못했으며, 이 괴로운 실존을 초월하는 폭넓은 예지를 증득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이 심각한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선다. 그가 자리를 옮긴 곳은 도시에 둘러싸인 왕사성이라는 산속이었다. 그는 영축산의 산림속에서 흑독한 수련을 계속하였다. 그때 그분은 부왕이 보내준 다섯명의 출가자들과 함께 엄격한 수련을 계속하였다고 전한다. 몸을 가시덤불위에 굴린다든지, 뜨거운 모래밭에 내맡기는 일등은 인도 고행자들이 흔히 취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애욕의 근원인 이 육신을 괴롭힘으로써, 영원한 자아(Atman)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빗대어 불전문학에서는 '설산수도(雪山修道)'라 표현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였다. 고행을 시작한지도 다섯 해 그토록 모진 고행을 겪은 태자의 몸은 쇄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등과 배가 맞붙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그럴수록 그의 정신세계는 더욱 집요하게 하나의 근원을 향해 응집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 전에 그가 품었던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때 태자는 이렇게 마음을 바꾸었다.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고행의 궁극으로 얻는 것은 결국 목숨을 잃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인제 나는 고행을 증지하고 단식도 그만 두며 다른 방법을 통해 대각에 접근해야 하리라. 그리고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나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었다.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우루벨라 촌장의 딸인 '수자티'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죽(유미죽)를 얻어 마셨다. 우유의 맛은 비길데 없이 감미로 왔다. 그것을 마시고 나니 그의 몸에서는 새 기운이 솟아났다. 그리고 얼마 후 옛날과 같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드디어 고행을 버리고 네란자라 강에 나아가 목욕을 하고 한 여인으로부터 우유죽을 공양받았다. 이를 보고 함께 고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타마가 타락했다며 그를 떠나 사르나트 교외에 있는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심기일전한 싯다르타는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가 한 보리수(핍팔라나무) 아래 지나가는 목동이 준 길상초(吉祥草)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앉아 "우주의 실상을 깨치기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하는 결심을 하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이제 앞에서는 강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마음은 날듯이 흘가분했다. 모든 것이 맑고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다.
'순수한 명상에 의하여 대각을 얻기까지는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의를 품은 채, 이때 마왕 마라(Mara: 일명 마왕 파순)가 그 분의 곁에 와서 대각을 방해한다. 마라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첫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딸, 둘째는 '감미로움', 셋째는 '성욕'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태자를 유혹하였다. 싯다르타는 이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마왕 파순을 굴복시키고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 無上正得正覺)를 이루었다.
* 위와 같이 마왕을 굴복시키고 미증유의 깨달음을 이룬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수하항마(樹下降魔)'라고 한다.
드디어, 밤의 첫눈이 뜨였을 때 싯다르타는 첫 번째 지혜에 이르렀다. 지난 전생에 일어났던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밤의 눈이 반쯤 뜨였을 때 두 번째 지혜에 이르렀다. 현재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현상과 사물에 대해 이해했다. 밤이 완전히 눈을 떴을 때 세 번째 지혜를 얻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루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이해했다.
이레째 되던 새벽, 주위는 새로운 고요에 휩싸이고, 샛별이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한다. 명상에 잠긴 태자의 마음은 문득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먼동이 틀 무렵 드디어 확연한 깨달음이 싯다르타에게 다가왔다. 무엇이 이 생존을 윤회속에서 허덕이게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 괴로움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무엇이 삶에 내재되어 있는 업의 덩어리인가.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 모든 문제들을 한결같이 하나의 확신을 가진 채 대답해 주고 있었다. 이로써 구도자 싯다르타는 존재의 실상을 깨친 부처님이 된 것이다. 밝은 새벽 별을 보고 깨쳤다하여 이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라고 부른다.
그 때 대각을 이룬 나이가 '35살'이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싯다르타가 아니였다. 몸은 비록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평범한 존재였지만 이제 그분은 위대한 분, 대각을 얻으신 분, 붓다(Buddha)가 되신 것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을 초월한 분, 모든 생명의 초월자이면서도 그 생명의 싹 속에 의미를 주는 분으로 부처님은 탄생하신 것이다. 대지는 진동 하였으며, 하늘에서는 천화(天花)가 나부꼈다. 그때 싯다르타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다.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된 싯다르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생각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가 처음 출가하여 수행한 동기는 우선 자기 자신의 구제에 있었다. 생로병사라는 인간고뇌의 실상을 보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와 태자의 지위도 내던지고 뛰쳐나왔던 것이다. 이제 보리수 아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자 자기 자신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그 이상 아무 것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 사람에게 널리 전해 해탈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곧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우주의 진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본 부처님의 자비였다.
그는 이제부터 중생들을 구제하는 길에 나서기로 새로운 뜻을 세웠다. 그러나 마왕은 부처님께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전파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소(牛) 있는 자는 소로 말미암아 즐겁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즐겁다. 그대는 이 세상에 의지할 데가 없지 않은가" 그에 대해 부처님의 대답은 의연하였다. "소 있는 자는 소로 말미암아 괴롭고, 자식 있는 자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괴롭다. 여래는 의지할 바 없음을 의지함으로 기쁨을 삼노라!"
부처님은 결연히 보리수를 박차고 중생을 향해 걸음을 옮기신다.
'이 세상이 어두워질 때, 나는 쉼 없는 진리의 북을 치리라'
깨침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깨침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몸소 깨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한 바를 좇아 생각해 본다면 첫째 정적(情的)으로 그것은 한량없는 기쁨이다. 둘째, 지적(知的)으로는 '하나'인 세계의 체험이다. '나'다 하는 벽이 깨져 나와 남, 나와 우주가 하나되는 것이다. 끝으로, 의지적(意志的)으로는 진정한 자비의 실천이다. 나와 중생이 하나 됨으로써 동체자비의 실천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전법(轉法)
부처님은 대각(大覺)을 이루신 후 '무명(無明)의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는 중생들이 부처님이 깨달은 심오한 진리를 알아 들을 수 있을까?'라고 부처님이 고민을 하면서 교화활동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자, 범천이 부처님에게 진리의 법바퀴를 굴려 주실 것을 청하여, 드디어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일어나 중생제도의 길에 나섰다.
* 위와 같이 범천이 부처님께 전법도생(轉法度生)을 권한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범천(梵天)의 권청(勸請)'이라고 한다.
대각을 이루신 부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녹야원(鹿野苑)에서 설법하였다고 '전법륜경'에 전해 오고 있다.
*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첫번째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한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초전법륜(初轉法輪)' 또는 '녹원전법(鹿園傳法)'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삶은 고통이다. 태어나는 것, 늙은 것, 병드는 것, 죽어야 하는 것은 고통일지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 원한 있는 자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고통이니라.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이니, 요컨대 번뇌의 수풀 위에서 뿌리박은 이 몸이 존재하는 것이 고통이니라. 무엇이 이 고통의 근본이랴? 성내고, 탐내고, 어리석은 것, 이 세 가지가 모든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이니라. 고통의 소멸을 열반이라 하느니라. 갈애의 피안을 벗어나서 영원한 기쁨에 안주하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경지를 얻을 수 있을까? 올바로 보고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업을 지니고, 올바른 생활수단을 갖고, 올바로 기억하고, 올바로 노력하고, 올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 바로 열반을 얻는 방편이니라."
부드럽고 차근차근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던 다섯 비구는 이내 그 길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진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교진여 등 다섯 비구가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한동안 녹야원에 계실 무렵, 바라나사에 야사라고 하는 큰 부자의 아들이 있었다. 이 젊은이는 왕에 못지 않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젊고 어여쁜 아내와 많은 시녀들에게 둘러 싸여 애욕의 생활에 빠져 있었다. 하루는 흥겨운 잔치를 끝내고 잠에서 깨어난 야사는 그때까지 지쳐서 자고 있던 여자들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았다.
그토록 아름답던 시녀들의 추하게 자는 꼴에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와 괴롭다고 외치면서 돌아다닐 때 부처님께서 야사를 불러 법을 설하였다.
야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마음은 점차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 집착한 것이 다시없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았다. 부처님은 야사에게 인생의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야사는 그 자리에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얼마 후 야사의 아버지도 아들 야사의 뒤를 따라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고 제자가 됨으로써 교단사상 최초의 남자 재가신도(우바새)가 되었다. 야사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최초의 여자 재가(우바이)가 되었다.
또한 야사의 뒤를 이어 그의 친구 56명도 함께 출가하여 비구가 됨으로써 승단은 어느덧 62명의 단원을 가진 게 되었다. 이윽고 그들의 공부가 어느 정도 완성되자, 부처님은 그들을 각각의 지방으로 파견하여 교화할 것을 명하고 스스로 마가다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마가다 지방에는 일찍부터 우루벨라 캇사파(Uruvela Kassapa)의 형제들이 종교적으로 위세를 일찍부터 떨치고 있었다.
그들 삼형제인 우루벨라, 가야(Gaya), 나디(Nadi)는 불을 섬기는 무리로서 각기 수백명씩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있는 세에나 마을에 도착하여 우루베라 거처로 찾아가 그의 사당인 성화당에서 하루밤 쉬어갈 것을 청했다.
"대사문이시여, 저에게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그 곳에는 신통력을 가진 용왕이 있고 무서운 독을 가진 독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해칠까 두렵습니다."라고 은근히 겁을 주었다. 안에 들어간 부처님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화가난 용왕와 대결을 한다. 용왕이 연기를 뿜으면 같이 뿜고, 화염을 토하면 같이 화염을 토하면서 부처님은 용왕의 화력을 없애 버렸다.
우루벨라의 제자들은 부처님이 참된 수행자의 기품은 지녔지만, 결국 용왕에게 당하고야 말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부처님은 그 용을 바릿대에 담아서 우루벨라에게 보였다. 이에 우루벨라는 탄복하여 그만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한 뒤 법을 듣기를 간절히 청했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눈은 불타고 있다. 색채와 형태는 불타고 있다. 눈의 식별작용은 불타고 있다. 눈의 접촉(색, 형태, 식별작용)은 불타고 있다. 눈의 접촉에 의해 꼭 생기는 감수는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닐지라도 그것 역시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서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혐오의 불로, 미혹의 불로 모든 것은 타오르고 있다. 탄생과 노쇠, 죽음과 근심, 슬픔과 고통, 번뇌와 번민에 의해서 불타고 있는 것이다." 라고 부처님은 이들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에게 인간의 고뇌를 불에 비유한 '불의 설법'을 하여 모두 해탈시켰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된 우루벨라, 가야, 나디 삼형제와 그들 제자 100명은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이리하여 부처님은 그들을 거느리고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가하(王舍成)로 향했다.
일찍이 태자시절 도가 이루어지면 맨 먼저 자기를 제도해 달라고 청한 왕사성(王舍城)의 빔비사라(Bimbiisara)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빔비사라 왕은 말하였다.
"저 석가족 출신의 세존 고타마는 아라한이며,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며, 밝은 지혜와 행을 갖춘 사람이며, 깨달음에 이른 행복한 사람이며, 세간을 아는 사람이며, 위없는 사람이며, 사람을 잘 다스리고 길들이는 사람이며,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며, 깨달은 이며, 세간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시다. 그 분은 스스로 알고 증득하여 중생을 가르치신다. 그 분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좋은, 내용도 있고 표현이 완전한 교법을 설하시며, 완전하고 원만하며, 모든 것에 두루 깨끗하고 맑은 행을 설하신다. 그와 같은 아라한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왕은 곧 12만 바라문과 장자들을 이끌고 부처님 처소에 찾아가 예배하고 법을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보시에 관한 이야기와,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일과, 하늘에 태어나는 이야기와, 욕망이란 모든 것의 화근이며 저속하고 더러운 것이라는 이야기와, 미혹을 벗어나는 것이 이롭다는 이야기를 차례로 들려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이야기를 듣고, 건전하고 온화한 마음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과 환희심과 맑은 마음을 갖춘 것을 아시고, 외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없애는 것과, 괴로움을 없앤 경지에 이르는 길의 네 가지 진리를 설하시었다. 네 가지 진리를 들은 빔비사라 왕과 12만의 바라문과 장자들은 무릇 인연으로 해서 모이고 생긴 것은 이윽고 모두 소멸된다는 진리를 깨달았으며, 그 중 1만의 사람은 재가신도가 되었다. 그 때 빔비사라 왕은 법을 보고, 법을 알고, 법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의혹이 없어지고, 주저함이 없는 확신을 얻었으며 스승의 가르침 이외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은 경지에 들었기 때문에 부처님에 사뢰어 "오늘부터 이 목숨이 다하기까지 삼보에 귀의하고 법을 받들겠나이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은 부처님이 거처하실 곳을 물색하던 중 마을에서 멀지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고, 다니기에 편리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부처님을 찾아 뵙고자 할 때 언제든지 가기 쉽고, 낮에는 혼잡하지 않고 밤에는 소리가 없어 조용하며,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사람들로 해서 번거롭지 않은 홀로 앉았기에 알맞은 벨루바나를 희사하여 그곳에 크게 가람을 건립하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는데, 이렇게 빔비사라왕이 지어 부처님께 희사한 것이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한편 얼마 후 그곳에 살던 청년 사리불(舍利佛)와 목련(目蓮)가 최초의 다섯 비구의 한 사람인 앗사지에게 감화를 받아 자연외도인 스승 산자야 벨랏티푼타를 버리고 2백50명의 동료들과 함께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다같이 석가모니불의 10대제자로 손꼽히게 되었다. 또한 마가다국 출신의 가섭(迦葉)는 본래 바라문족으로서 부유하게 살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성도한지 3년쯤 되었을 무렵 죽림정사로 찾아와 비구가 되었다. 그가 곧 부처님 입멸 후 교단을 이어 받은 10대 제자 가운데 두타제일의 마하캇사파(대가섭, 가섭존자 또는 가섭이라 불림)이다.
한편, 부처님이 라자가하에 오셔서 설법을 한 지 얼마 안되어 수많은 강물이 한 바다로 모여들듯 온갖 계층,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부처님의 교단으로 모여들었다. 왕족, 대신, 부호, 장자, 장군, 학자, 이교도, 농민, 상인, 천민 ,노예 ,죄인 등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지난날의 모든 계급과 신분과 허물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깨끗한 부처님의 제자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다정한 진리의 벗인 법우가 되어 넓고 깊은 부처님의 법 바다에서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면서 평등 사회를 이룬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에서 중생교화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고향인 카필라밧투에서는 부왕 이하 모든 국민이 부처님의 환국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싯다르타 태자와는 동갑으로 어렸을 때부터 태자와 함께 자란 친구이며 지금은 왕의 신임이 두터운 대신 우다인을 라자가하로 보내 부처님을 모셔오게 했다. 십여년전 한밤중에 성을 넘어 왕궁을 등지고 출가할 때는 각오가 비장했고 슬픔도 컸었지만, 이제 태자는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이 되어 당당하게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온 국민의 환호 속에 부왕을 비롯한 가족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마친 부처님은 편히 쉬는 일도 없이 친족들을 향해 법을 설했다. 그리하여 어린 아들 라훌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왕족들, 즉 사촌동생들인 데바닷타와 아루나, 아난다와 마하파자파티 소생의 이복 아우인 난다 등이 모두 출가하여 교단에 들어오게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출가하려는 것을 부처님께서 거절하자 아난다가 '여성도 출가 수도하면 최후에는 성자의 최고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방패삼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자애롭게 보살펴 주신 양모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것을 간청하여, 비구니는 설령 자신보다 후에 출가한 비구라 할지라도 그를 공경하고, 비구의 교단에서 떨어진 독립된 장소에서 살아서는 안된다는 여덟가지 계법을 만들어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였다. 이로서 마하파자파티는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한편 파세나짓왕이 통치하고 코살라국의 사밧티에는 수닷타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남달리 자선심이 강해서 항상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므로 사람들은 그들 급고독장자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그는 장사를 위해 라자가하에 갔다가 그곳에 부처님을 뵙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귀국한 뒤 부처님을 위해 안거하기 좋은 장소를 구하던 중 마을에서 멀지 않고 수행하기에 조용한 제타숲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제타숲은 파세나짓왕의 아들인 제타 왕자의 소유였다. 수닷타는 정사를 짓겠으니 동산을 팔라고 청하였다.
왕자는 당신이 저 동산 가득히 황금을 채워 준다면 몰라도 팔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수닷타는 곧 전재산을 다 걷우어 황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황금을 실어다 동산에 깔았다. 이것을 본 왕자는 수닷타의 굳고 뜨거운 신앙심에 감동하였다.
"수닷타 장자여 그만 두시오! 정사를 짓는 것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입구의 빈 터를 나에게 양보해 주지 않겠오. 나도 부처님께 선물을 하고 싶습니다." 수닷타는 쾌히 승낙하였다.
왕자는 그 빈터에 문을 세우고, 정사를 위한 부속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수닷타 장자가 짓는 정사에 필요한 나무를 심어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머물게 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기원정사'로서 흔히 '기수급고독원'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부처님께서 사밧타 성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이 사밧타에는 가난한 한 난다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여인은 너무도 가난하였기 때문에 이집저집 떠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빌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성 안이 떠들썩한 것을 보고, 이 여인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부처님께서 이 성으로 오신답니다. 오늘 밤, 파세나짓 왕과 시민들이 수만개의 등불을 밝혀 연등회를 베풀고 부처님을 맞이한답니다."
이 여인도 그 말을 듣자 등불을 켜 부처님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었으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여인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전을 두닢을 빌어 기름집으로 갔다. 기름을 어디에 쓰려느냐고 주인이 묻자, 여인은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 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부처님이 이곳까지 오셔서 만나. 뵙게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가진 것이 없으니, 등불이라도 하나 밝혀서 부처님을 맞이할까 합니다." 여인은 이 기름으로 부처님께서 지나가실 예정으로 있는 길목의 한 모퉁이에 등불을 밝혔다. 그 등불은 조그마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 등불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했다.
"부처님, 저는 가난해서 아무 것도 부처님께 공양 올릴 것이 없습니다. 오직 보잘 것 없는 이 등불 하나를 밝히오니, 이 공덕으로저도 오는 세상에 성불하게 되기를 발원하나이다." 밤이 깊어지자 환하게 밝혀졌던 거리의 등불이 모두 꺼졌다. 그러나 유독이 가난한 여인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등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부처님께서 주무시지 않을 것이므로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다는 그 등불 곁으로 다가가 가사자락과 손으로 등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끝내 꺼지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 등불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한 여인이 널고 큰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등불을 켠 공덕으로 오는 세상에 성불하게 될 것이니라."
어느 때 부처님은 사밧티에 들어가 밥을 빈 다음 슈라바이스티 부근을 지나갈 무렵에 일이다. 그곳에서는 앙굴리마라(Anguli mara)라는 희대의 악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백개를 채우고자 하였다. 부처님을 본 앙굴리마라는 "섯거라, 비구여"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발길을 멈추지 않은신 채 앙글리마라에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서 있노라.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도다."
앙굴리마라는 순간 기이한 느낌이 든다. 자기는 서 있고 저 비구는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저 비구는 거꾸로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앙굴리마라여 ! 내 마음은 언제나 잔잔한 호수처럼 움직임이 없노라. 왜냐하면 여래에게는 남을 해칠 생각, 미워하는 마음 등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네 마음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죽이려는 생각 뺏으려는 생각으로 그대의 마음은 언제나 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대로 움직인다 하였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니라." 앙굴리마라는 부처님 앞에 엎드린다. "부처님이시여! 저 같은 악한도 불법을 들을 수 있으리까?"
"아무렴 그렇고 말고 앙굴리마라여! 인간의 불성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느니라" 그는 드디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지혜의 눈을 뜨게 되었다. 아란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앙굴리마라가 부처님께 여쭙는다.
"부처님이시어! 무엇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까?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어 이해한 바에 의하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의 칼날 앞에서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렇고 그렇도다. 앙굴리마라여!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도다. 미운 마음도 괴로운 마음도 일으키지 않을 뿐더러 그 죽이려 사람을 향해 네가 바로 부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보살의 마음이니라" 보리수 아래서 대각을 이룬 후 부처님께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지혜롭게 사는 길을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시골인 에카사라에 계실 때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아침 일찍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듣고서 바라드바쟈라고 하는 바라문의 농원으로 탁발을 가셨다. 그때 그 집 주인인 바라드바쟈는 마을 사람들을 지휘하여 농사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라드바쟈는 부처님께서 음식을 얻기 위하여 서 계시는 것을 보자 이렇게 말하였다.
"사문 고오타마여! 나는 손수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며 곡식을 거둬들인 다음에야 음식을 먹습니다. 사문이여! 당신도 손수 논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당신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바라드바쟈 바라문이여 ! 나도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어서 먹을 것을 얻고 있느니라"
"사문이여! 우리들은 누구하나 당신이 괭이나 쟁기를 끄는 소를 본 적이 없소. 쟁기도 소도 없이 어떻게 논밭을 갈며 씨를 뿌리고 가꾼다고 하십니까? 그 까닭을 설명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시었다.
"믿음은 종자이며 고행은 단 비이다. 지혜는 나에게 있어서 멍에이며 괭이이며, 참회하는 생각은 팽이의 자루이며, 사유는 멍에의 줄이며, 생각이 깊은 것은 내 괭이의 끝이 되고 채찍이 된다. 악한 행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입을 삼가며, 밥을 먹을 때는 밥을 아끼며, 진리로써 풀을 베고 열반의 즐거움이야 말로 나의 음식이다. 정신과 노력은 나의 멍에를 끼운 소이며, 그것은 나를 편안한 경지에로 실어간다. 열반을 향하여 나아가 도달한 다음에는 가고 돌아섬이 없고 행하여 슬퍼함이 없으며, 이 같이 농사를 지어서 얻은 곡식은 감로 이다. 나는 이와 같이 농사를 지어 일체의 고뇌에서 해탈을 하였다." 그때까지 진실한 사물들을 바라볼 수 없는 어두움 속에 있었던 바라문 가슴속에는 부처님의 말씀은 등불과 같았다. 바라드바쟈는 크게 깨닫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공양을 올리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에는 사리불(또는 사리자, 사리붓다)가 있었다. 사리불는 조용한 숲속에서 선정에 들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인연으로 불법이 이 세상에 오래 갈 수 있고 흑은 오래갈 수 없게 되는 것일까?' 그는 부처님 앞에 나아가 이 뜻을 여쭈었다. 부처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과거 모든 여래의 가르침을 보면 어떤 것은 오래 갔고 어떤 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가르침이 오래 존속된 부처님은 반드시 계율을 제정하여 제자들에게 실천 하도륵 가르쳤다. 계율을 받아 지님으로써 바른 법을 수행하는 데에 게으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이 일은 하고 이 일은 하지 말라. 이 일은 생각하고 이 일은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끊고 이것은 마땅히 갖추어 지키라.'"
이와 같이 분별해 가르치지 않았어도 부처님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동안은 잘못됨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입멸한 후에는 갖가지 이름과 서로 다른 성과 온갖 집안에서 출가한 이들이 저마다 제 성질을 부리게 되니, 바른 법이 빨리 멸하여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을 높은 탁상에 올려만 놓고 붙들어 매는 끈이 없으면 오래지 않아 바람에 불려 흩어져 버리는 것과 같다. 사리풋다여! 여래의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려면 반드시 엄격한 계율이 있어야 한다. 이 계율로써 모든 제자들을 잘 거두어 그릇된 행동을 미리 막아야 할 것이다. 잘 정돈되어 흩어지지 않는 꽃다발은 끈으로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들은 사리풋다는 크게 감동하여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어! 일찌기 듣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그러시다면 그 계율을 지금 제정해 주십시오. 모든 비구들에게 청정한 수행으로 바른 법이 오래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사리불아! 아직 가만 있거라, 여래는 그 때는 알고 있느니라. 앞으로 비구들이 명예나 이해 관계에 얽히게 되면 허물을 범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것을 막기 위해 비구들에게 계율을 제정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잘못된 일이 없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 헤지지 않은 새 옷을 미리 기울 것은 없지 않느냐."
얼마 후 교단에서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칼란다카 마을 출신인 수디나라는 비구가 있었다. 본시 재산이 많은 집안의 출신으로 믿음이 굳었기 때문에 출가하여 수행승이 되었는데 그만 어머니의 간청에 못 이기어 자식을 낳게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일을 아시고 모든 비구들 앞에서 수디나를 불러 크게 꾸짖고 말씀하시었다.
"수디나여! 네가 한 일은 옳지 못하다. 그 짓은 위의가 아니며 사문의 할 일이 아니다. 그 짓은 청정한 행동이 아니며 수순한 행동도 아니다.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적을 없애 버린다. 애욕은 얽어 묶는 밧줄과 같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다. 애욕은 험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 같고 더러운 시궁창과 같은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은 애욕을 떠나 도를 깨닫고 열반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수디나가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이제부터 계율을 제정하여 지키게 해야겠다. 여기에는 열 가지 뜻에 있느니라.
첫째는 교단의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둘째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요,
셋째는 대중을 안락하게 하기 위함이요,
넷째는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기 위함이요,
다섯째, 이미 믿는 이를 더 굳세게 하기 위함이요,
여섯째, 다루기 어려운 이를 잘 다루기 위함이요,
일곱째,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기 위함이
요,
여덟째, 현재의 실수를 막기 위함이요,
아홉째, 미래의 실수를 막기 위함이요,
열째, 바른 법을 오래가게 하기 위함이다.
계율을 말하려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하라. 어떤 비구가 부정한 행을 범하고 음행을 범하면 그는 파라지카(根本罪)이다. 함께 살지 못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비구들에게 프라티목샤(戒本)의 첫째 조문을 제정하고 널리 알렸다.
이때부터 때와 곳을 따라 비구들의 잘못을 보실 때마다 널리 가려내어 말씀하였다. 그래서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가 마련되었다.
뭇중생들을 위해서 45년간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교화활동을 펴신다.
부처님의 열반(涅槃)
부처님이 80세가 되시던 해, 부처님께서는 벨루바(Beluva)라는 곳에서 여름 안거를 지낸다. 이곳은 바이샤알리 부근에 있었다. 우기가 걷히자 부처님께서 북으로 발길을 옮겨 리치치하비스(Lichchavis)라는 부족이 사는 마을을 통과하신다. 그리고 파바(Pava)라는 마을에 묵으실 때 대장간을 하는 춘다(chunda)의 공양을 받으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카쿠쯔타(Kakutstha)의 강둑에 닿으신다.
그 곳에서 목을 축이고 목욕을 하신 다음, 쿠시나가라(Kushinagara)에 닿으셨다. 사십여년을 곁에서 모신 아난다(Ananda)에게 사라(Sara)나무 밑에 침상을 준비하라고 이르신 후 부처님께서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마치 사자처럼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고요히 누우셨다.
"아난다여! 쿠시나가라의 말라스(Mallas)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오늘밤 자정 무렵 여래는 열반에 들리라고, 아난다여, 나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구나, 나의 여정은 이제 막을 내리려 하노라. 나는 이제 팔십세가 되었구나. 비유컨대, 낡은 수레가 움직일 수 없음과 같을지니라. 육신이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만큼, 늙고 병들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내가 이미 가르치지 않았던가,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은 다 사라져 없어지리라고. 그러나 여래는 육신이 아닌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내가 가르친 진리는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하리라."
아난다는 눈물을 삼키며 이 슬픈 소식을 말라스의 사람에게 전하고, 다시 부처님께 그 삶을 연장시킬 수 없겠느냐고 간청한다. 부처님께서는 그윽한 미소로 제자들을 달래시고, 슬픔에 잠겨 사라수 곁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펴고자 했다.
이때 쿠시나가라의 100살이 넘은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평소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허둥지둥 사라수의 숲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지금 매우 피곤하시고 병을 앓고 계시니 번거롭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그의 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수바드라를 가까이 오도록 이르시고 말씀하시었다.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말아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부처님은 수바드라를 위해 설법을 들려 주셨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었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것이다. 이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시간이 가까워 지자 무수히 모여든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회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야 한다.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위에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야 한다. 함께 내 교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이든지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자리이타의 법을 다 갖추었으니 만일 더 오래 머루른다 해도 이 이상 이익 될 바가 없을 것이다. 마땅히 제도할 사람은 이미 다 제도했으며 아직 제도 받지 못한 이가 있더라도 득도의 인연을 모두 지었다. 이제부터 나의 모든 제자들은 정법을 서로 전하고 이어 받으며, 여래의 법신이 상주하여 항상 사라지지 않게 하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시기전 아난에게 마지막 남긴 유훈(遺訓)을 간략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한다.
더 풀어쓰면,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제행무상 불방일정진'(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諸行無常 不放逸精進 :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열반송(涅槃誦)'을 남기셨다.
이 말씀을 남기고 부처님께서는 평안히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이야말로 진리 속에 살다 진리 속에 가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다. 그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을 들어 보였다. 그가 들어 보인 길은 다름 아닌 지혜와 자비의 길이었다.
그로부터 일 주일 동안 부처님의 육신은 꽃으로 장식되어 많은 이들의 충심으로부터의 송별을 받았다. 돌아 가신지 꼭 일주일이 되던 날 육신은 마쿠타반다나(Makutabandhana) 사원으로 옮겨졌다. 그것은 그분이 가장 아끼던 제자 마하 캇사파(MahaKasyapa: 마하가섭)를 기다리기 위한 조치였다. 부처님께서는 열분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사리풋다(사리불) 목갈라나(목건련) 두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상수제자였던 마하캇사파(마하가섭)는 이때 다른 지방으로 전교를 떠났던 것이다. 가섭이 도착하자 부처님께서는 두발을 관밖으로 내어 가섭에게 보이신다. 마하캇사파는 스승의 육신에 정례하고 장례를 비롯한 교단의 사후수습을 진두 지휘하였다.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마하가섭에게 관밖으로 두발을 내보이신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이라고 한다.
부처님 입적 소식은 인근 여러 나라에 퍼졌으며 평소에 부처님을 존경하던 모든 이들은 이 장례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화장 후 그 분의 사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 사리를 모시기 위한 분쟁이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타협을 보지 못하고 전쟁마저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그때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드로나(Drone)라는 현자가 있어서 중재를 시도, 그 사리를 똑같이 8등분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서로 그 사리를 정중히 모시고 가서 스투파(Stupa: 탑)를 세우고 깊이 공양하게 되었다.
* 부처님의 일생중에 부처님을 슬프게 한 세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석가족이 코살라국에 멸망을 당한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목련)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든 것이고, 셋째는 부처님의 사촌인 아난다의 형이었던 데바닷다의 반역이었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교단이 커지자 마가다국의 태자 아자타삿투의 후원을 받아 부처님의 교단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며 자객을 보내고, 높은 산에서 바위를 굴리고, 성질이 포악한 코끼리를 풀어 부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참고사이트 : http://www.buddhapia.com/_Service/buddhapia/000000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