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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5. 22:20 진실탐구

정치판에서 뭐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현상황이 답답하고 억울할 때면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표현으로 얼버무리며 결말을 짓는 경우가 있다.


그 심정은 백번 이해하면서도 그눔의 역사

요즈음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 상황인 데다가

기억해 둘 역사가 어디 한두가진가?


전두환같은 녀석의 예만 보아도 기념관을 짓겠다고 나서는 자도 있고

현재 과징금회수를 위한 작업이 진행되는 상태를 보면

역사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질 가능성도 희박할 뿐더러

제대로 평가된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랴 싶어 가슴이 답답하다.


21세기에 들어선 요즈음 같은 시대에도

국정원의 정치개입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사건이 터지질 않나

그 덕분에 집권층이 된 한나라당은 후안무치한 태도로 궁민을 무시하고 있어도 

우리 사회의 권력기관이나 언론이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역사의 평가' 그거 별거 아니라는 못난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역사의 평가에 맡겨 둘 필요 없이

현재 문제는 현재에 해결해 버리려는 

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보수 언론에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어도

이번 주말에도 국정원 정치개입 관련 촛불집회가 국내외에서 계속될 모양인 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같다.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declaration201307.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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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7. 24. 23:49 진실탐구

한 때는 '신문에 나온 거다'라고 이야기하면

그건 곧 사실이요 확실한 내용이라는 말을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떠한가?

일단 신문들이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자기의 스탠스에 입각하여

'~카더라' 식의 소설을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주류언론이라는 조중동 같은 보수신문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혈안이 되어 소설을 쓰는 경우가 허다한 데

그러다 보니 신문기사에 대한 공신력은 땅에 떨어져 버렸고

이제는 예전과는 달리 '신문에 났더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의구심이 생긴다.


예전에 천안함 사건 때 조선일보는 인간어뢰도 그림까지 그려가며 사기를 치더니

엊그제 동아일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이지원 기록이 삭제됐다고 대서특필 했다.




조명균 전비서관이 검찰에서 그렇게 진술했다는 것인데

정작 조비서관이 그런 사실이 없다며 이를 부인하고 있고

오늘 국회에서는 황교안 법무부장관도 그런 발언을 들은 것 같지 않다고 언급을 했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101701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3/07/24/0502000000AKR20130724122251001.HTML?template=2085


문제는 이렇게 신문들이 사기를 치고 소설을 써 대도

아직도 신문을 맹신하는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개인의 경우에도 한번 신용이 떨어지면 회복하기 힘들다.

내 돈 떼어먹은 거짓말장이를 두번 믿고 다시 돈을 빌려주기 힘든 것처럼...


하물며 사실보도를 생명으로 삼고 있는 언론기관이 

그동안 수십번 사기를 치다 들통이 났는 데도

아직까지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명바기는 대화록을 보았다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떠벌렸더만.

기록에서 삭제되었다면 어떻게 본거지

그리고 이런거 봤다고 떠들어도 죄가 안되나?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ID=2013020500134&FV=%B4%EB%C8%AD%B7%CF&searchPage=simple&collectionName=gisa&INDEX_FV=&INDEX_FV=TI&INDEX_FV=TX&INDEX_FV=KW&AU_FV=&PD_TYPE=false&PD_F0=year&PD_F1=20130205&PD_OP=2&PD_F2=&DATA_SORT=1&LIMIT=50&LIST_TYPE=true&PP_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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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7. 16. 22:18 진실탐구

하늘이 내리는 폭우

인간이 치켜든 촛불


걱정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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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7. 12. 08:42 진실탐구

얼마전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준 음성파일 하나를 듣고

서화숙이라는 기자를 알았다.


사실 난 티브이방송이나 신문을 별로 보지 않고

인터넷에서 주로 정보를 얻는 편인데도

왜 그동안 서화숙 기자를 잘 몰랐던 것일까?


'국정원을 해체하라'는 그녀의 육성을 들으며

아!! 대단한 여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고

[국민 TV] 서화숙 3분 칼럼 이라는 별도의 사이트를 통해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용감한 기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대한민국의 젊은 기자 녀석들은 모두 어디에들 가 있는 겨?

아시아나 비행기 추락사고 보도에?



클릭!! : http://file.ssenhosting.com/data1/guitarkirk/702seohwasug.mp3



http://ireport.cnn.com/docs/DOC-1002200



[국민 TV] 서화숙 3분 칼럼 : http://www.podbbang.com/ch/6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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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7. 12. 08:16 진실탐구

기성용 사태를 보며 한 직장인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분석을 해 놓은 글을 보며 '공감'을 하게 됐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기성용 사태의 원인과

홍명보감독이 기성용에게 <'옐로우 카드'의 의미가 뭔지 알 것!>

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한 이해도 한결 쉽게 되드만....


==========================================================


칼럼 : 30살 노땅이 보는 기성용 사태


난 30살의 노땅 직장인이고 얼마전에야 겨우 대리를 단 사회 밑바닥에서 걸레질하고 눈치보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번 기성용 사건을 보면서 저기도 사람사는 곳이구나 싶고 내가 겪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이번 사건을 말해보겠다.

국내파 해외파 이런 단순한 구분이 신분이 된 것은 조광래부터였다. 해외파는 소속팀에서 출전을 하던 말던 벤치에 있던 아예 출전명단에도 없던 무조건 국대명단에 오르던 때가 있었고, 국내파는 그냥 땜빵. 그것도 제 포지션에도 못서는 땜빵 노릇을 하며 훈련파트너 취급 받는것이 얼마전이었다. 

갈등이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겠지. 그러니까 해외파 국내파 따로 밥을 먹고 기성용이 우리를 건드리면 안됐다라고 씨부릴만큼 그 구분이 명확했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도 그렇다. 고졸사원, 하청업체 사원, 계약직, 정규직 이런 구분이 있고, 디테일한 대우가 다르고 이들끼리 밥을 따로 먹는 것은 흔한 일이다. 같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고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지만, 우리가 하나라는 소속감은 없다. 그냥 맘에 맞는 몇몇과 어울릴 따름이지.

회사내에서도 라인이 있고 그 주류에 속하는 라인은 승진도 빠르고 대우도 좋다. 우리쪽은 고려대라인이 쎄다. 결혼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빨리 대리를 달고싶어 좆이 발딱 서있을 때 일찍 승진한 내 사수에게 술자리서 어떻게하면 승진할 수 있냐고 물은적있다. 술에 잔뜩 꼴은 내 사수는 혀꼬인 발음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야 니가 우리랑 같냐? ㅎㅎ 내 사수는 고려대였다. 난 명지대였고

솔직히 쇼크먹었고, 억울하고 분했다. 머리로는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가슴은 인정하기 싫었다. 공부 안 한게 후회됐고, 이직하고만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회사에 애정을 버렸다. 주는 만큼 일한다. 내 책임외에 일은 안 한다. 같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2주에 한번씩 회식을 하고 언제나 업무 시작전에 우리는 하나 무슨무슨 2팀 화이팅 아자아자 하고 구호를 외치고 시작하지만ㅎㅎ 내가 한 팀이라고는 생각 안한다. 언제나 대체 가능한 부속품이지.

조광래에게 그냥 연습 파트너나 하는 쩌리로 취급받은 국내파, 기성용이 말한 우리에 속하지 않는 선수들은 나랑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거다. 상실감 허탈함 분노 좌절감 이번 사태로 멘탈에 금이 간 사람은 그들일거다. 주류가 되지 못하는 한계를 규정되어진거니까

나는 그저 내 일만 잘하자. 내 개인성과만 신경쓰자. 연말에 연봉협상 때 쓸 내 실적만 올리자하고 넘어갔지만, 그리고 그것이 우리 팀의 실적에 영향을 주진 않았다. 어차피 개인이 실적이 합산되어 팀의 실적이 되는 구조니까 다시 말해 각개전투만 잘하면 됐다. 근데 축구는 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개개인이 잘 한다고 되는게 아닌것이 단체 운동의 묘미 아닌가? 11명이 하나되어야 이길 수 있는 운동이 아닌가? 해외파 국내파가 나눠진 것은 우리 회사 내부가 계약직 정규직 하청직으로 나누어진 것 보다 더 큰 문제 일거다.

그래서 이번 홍명보가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고 어렵다. 파벌을 나누는 것은 쉬워도 봉합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이미 벌어진 사건과 얼키고 설킨 인간관계의 실타래를 풀고 서로간의 감정 응어리를 씻어내는 일은 솔직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고 양측이 협력 정도 하는 것으로 덮어질 뿐이다.

홍명보에 앞서 최강희가 먼저 봉합을 해보려했다. 해외파를 무조건 기용하고 주전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준으로 선수를 선발하려했다. 소속팀 출전 횟수 최근 스탯 몸 상태를 고려하여 선수들이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려 했다. 그 결과 국내리그 선수들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존의 특혜를 받던 선수들이 기존의 대우를 못 받게 되면서 불만이 생겨난다. 이건 욕할게 아니라 당연한거다. 인간이니까. 어떤 성인군자도 내 밥그릇에 손 대는 놈 가만 안 놔둔다. 하물며 혈기왕성한 선수들인데 더 했음 더 했겠지

나도 이런 일 겪은 적 있다. 2년전 회사서 외부 스카웃으로 성균관대 출신 부장이 들어왔다. 전 회사에서 실적도 엄청났고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들어와서 의욕적으로 우리 조직을 쇄신하려 했다. 기능에 따라 인력 재배치를 단행했고, 그 덕분에 고려대 라인이 다 해먹던 개꿀 거래처에 나도 빨대를 꼽고 꿀을 빨았다. 기존 주류였던 라인이 당연히 반발했고 내부 알력다툼이 보이지 않게 일어났다. 짬찌끄레기였던 나는 양쪽의 눈치를 보며 식사후에 커피마시는 것도 전략적 동선을 짜고 움직여야할 만큼 힘들었다. 

내 사수와 그쪽 라인은 부장을 틈만나면 씹어댔고, 나는 담배를 안 피운단 핑계로 적당히 비위를 맞추는 시절이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부장이 나타나도 욕을 멈추지 않았다. 주어를 생략한 욕이었는데 언젠가 부장이 누구에게 욕하냐며 물었을때 거래처일 때문에 그렇다고 슬그머니 넘어가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부장이 보여도 사람들이 말리지도 않았다. 

그후에 어떻게 됐냐고? 그렇게 부장을 앞장서서 씹던 정대리는 결국 걸렸다. 사적 술자리에서 욕이 새어나갔고 인생은 실전이어서 징계 처먹고 탕비실에서 2주동안 커피타다가 쪽팔렸는지 그만 뒀다. 나는 기성용이랑 정대리가 겹쳐보인다

기성용이 한게 뒷담화인가? 그냥 오프더 레코드로 한 말을 기자새끼가 까발려서 재수없게 좆된건가? 난 아니라고 본다. 눈 앞에서 대놓고 욕한거다. 단지 주어를 생략하고 욕했을 뿐이다. 공식 트위터로 수십만 팔로워 앞에서 최강희의 욕을 주어없이 씨부려서 능욕한 다음 뒤에서 지들끼리 낄낄거린거다. 이런 방식 익숙하지 않나? 사람 병신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학교서 왕따 괴롭히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이게 뒷담화라고? 어디에도 이런 악랄한 뒷담화는 없다. 뒷담화는 지들끼리 그 안에서 하는거지 수십만 팔로워 앞에서 주어없는 비난을 씨부린후 님 얘기 아니에요 오해에요ㅎㅎ 하는 것은 대놓고 욕한거나 다름없다. 그것도 안 걸려야되는데 병신처럼 걸리고ㅎㅎ 답이 없다. 이렇게 된 데에는 최강희가 기성용 어그로를 끈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동의한다. 단순하게 보면 어그로를 끈게 맞다. 근데 언제나 좋은 말만 들으면서 살 순 없다.

얼마전에 나는 팀장님에게 불려가 한 소리들었다. 헬레인저씨 요즘 좀 풀어진거 아니요? 결혼해서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은건 알겠는데 헬레인저씨 직급을 생각해야지 보고서 작성해서 올려요

솔직히 열받았다. 씨발 섹스 좀 하자 라는 말을 지르고 싶었지만 과장님의 이 말이 내가 미워서가 아님을 안다. 긴장 풀지말라는 말, 초심을 잃지말라는 말 나를 자극시키려 일부러 싫은 소리한 거란 것 안다. 적어도 초등교육 중고등교육 의무교육 똑바로 받은 새키라면 그정도 뜻이야 그정도 문맥이야 이해한다.

근데 대가리 빠가새끼들은 다르다. 말을 문맥으로 이해할 줄 모른다. 단어 그 자체로 이해한다. 기성용이 그렇다. 운동에만 집중한 전업 운동선수들이 기본적인 맞춤법도 틀리고 언어 독해력이 떨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니 기성용을 이해 못 할일은 아니다. 근데 기성용은 보통 선수들보다 언어이해력이 극도로 떨어진다. 장애인 수준으로

안익수 감독이 박종우에게 한 기성용처럼 하지마라 라는 말. 기성용의 실력을 폄하한 발언일까? 아니다 부산의 전술에 특화된 박종우 특유의 스타일을 버리지 말라는 전술적 조언이다. 기성용이 못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박종우랑 기성용은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뜻을 우리 빠가새끼 기성용은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 나처럼 뛰면 2군 가냐? 기분 나쁘네. 문맥을 전혀 읽지 못하는 언어 장애인 수준의 독해력이다.

최강희의 내셔널리그 발언? 감독들이 선수들과 흔히 하는 밀당용 언플이다. 에펨에서도 방심하지마라 아직 넌 더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선수 자만심 밟아놓지 않나?

기성용이 뛰는 리그를 폄하한게 아니라 스코틀랜드나 일본이나 중동이나 빅리그는 아니니 방심하지말고 열심히 해라. 해외파라고 무조건 뽑지 않겠다. 더 열심히 해라하고 독려하는 메시지를 보낸거다. 그런데 기성용은 언어기능에 장애가 있어서 글자 그대로 반응한다. 내셔널리그서 뛰는데 뽑아줘서 고맙다고. 이쯤되면 기성용은 문장의 문맥적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 하는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럴땐 쉽게 말해줘야한다. 열심히 하라고 방심하지 말라고. 최강희는 기성용의 언어능력을 고려해서 쉽게 말해주지 못 했다. 이런 말도 제대로 이해 못 할 줄은 최강희도 몰랐을거다. 이번 사태는 최강희의 세심한 배려의 부족과 기성용의 언어능력부족, 그리고 꼴리면 바로 해야하는 충동장애가 빚어낸 해프닝이다.

기성용의 이런 언어장애와 해외파라는 선민의식이 끼리끼리 문화가 맞물려 최강희 감독의 본 뜻을 오해하게 만들고 최강희 감독을 적대하기에 이르렀다. 기성용이 일반인 수준의 언어 독해력만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다. 이래서 사람이 배워야 하는거다. 이래서 사람이 무식하면 가만히 있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해외파와 국내파를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야하는 홍명보는 어려운 숙제를 하게 되었다. 화합? 협력? 진짜 어렵다. 시늉이 아닌 진심의 행동을 이끌어내는것. 사회에서 내가 느끼기엔 불가능해보인다. 아예 국대를 과거 올대팀으로 바꾸는게 쉬울 수도 있다. 솔직히 그게 더 쉽다. 그러나 홍명보는 그리 해선 안된다. 힘들더라도 먼길을 돌아가도 시도해야한다. 앞으로 국대에서 계속 지켜나갈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공정하게 국대를 운영했으면 좋겠다.





posted by 백발노인
2013. 7. 11. 23:00 진실탐구

문재인 의원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참여정부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관여한 인물들로서

오늘날 박근혜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김장수 실장, 윤병세 장관, 김관진 장관에게

당시 논의된 NLL의 내용에 대해 진실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자세히 읽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으나 내가 전에 들었던 내용이 사실이라면

세사람 중에서 김관진 국방장관은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의미에서

금번 문재인 의원의 요청에 대해 나름의 액션을 취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우리나라의 상층부들이 기회주의적 출세주의자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

제대로 된 사람들도 얼마간 있는 것 또한 사실 아닐까?




링크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oonjaein2&logNo=20191466143&categoryNo=51&parentCategoryNo=49&viewDate=¤tPage=&postListTopCurrentPage=&isAfterWrite=true



문재인 의원의 요청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윗 링크를 클릭하시면 된다.

내친 김에 문재인 의원 블로그도 내 블로그에 링크시켰다.




============================================


7월 12일자 기사에 이런 게 있었드만...

국방부에서는 이런 정도의 의사표시를 한 것 같은 데

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을까?


국방부 “장관급회담에서 NLL 고수” 김장수·김관진 우회적으로 치켜세워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국방부는 지난 12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2007년 정상회담 후속으로 열린 남북 장관급회담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고수했다”고 밝혔다. 


위용섭 국방부 공보담당관(대령)은 “정상회담 후속으로 열린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우리의 주요 전략은 NLL을 기준으로 같은 면적, 즉 등면적을 공동어로수역으로 설정하자는 것이었다”며 “이는 NLL을 인정한다는 전제하에서 논의하자는 취지였는데, 북측이 이를 거부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국방장관은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다. 김관진 현 국방장관은 당시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실무 준비에 참여했다. 국방부가 이틀에 걸쳐 정례브리핑에서 NLL 논란을 설명하고 나선 것은 ‘두 사람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에도 NLL을 고수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국방부는 전날 브리핑에서 김민석 대변인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말한 대로) NLL 밑으로 우리가 관리하는 수역에 공동어로수역을 만들자는 내용은 우리가 관할하는 수역을 북한에 양보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 결과는 우리가 NLL을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해 여권의 NLL 포기 주장에 국방부도 가세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앞서 민주당 문재인 의원은 지난 11일 김 실장과 김 장관, 윤병세 외교장관 3인을 지목하며 “NLL 논란의 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이런 상황에 이르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비겁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142223435&code=91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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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7. 7. 14:58 진실탐구

어제 오후 서울에서 내려오느라 터미날에서 티케팅을 하였는 데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된댄다.


하릴없이 터미날 지하상가 책방에 들러 책을 몇권 샀는 데

최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부록으로 실어 주목을 끈 바 있는

시사인 303호도 곁들여 샀다.



전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읽어보려 샀으나

저녁 늦은 시각이라 실내등을 모두 끄고 달리는 데다가 글자체도 작고

아무래도 흔들리는 차안에서 글을 읽기가 쉽지 않아 포기하고

정상회담에서 오간 대화내용을 유시민씨가 해설한 동영상을 보며 내려왔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연합뉴스라든가 오마이 뉴스 등에서도 이미 회의록 전문을 보도한 바 있었는 데

사실 그 내용이 일반 궁민들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야의 전문가라든가 당시 참여 당사자 등의 해설과

무엇보다도 언론의 해설이 중요하다 싶은 데 최근에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시피 

정상회담의 내용을 왜곡한 새누리당이 무리수를 두었다는 쪽으로

논의의 가닥이 잡혀가고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시사인 편집국에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보도한 배경을 설명한 부분을 올려본다.


"이처럼 공개 자체가 비판을 사는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의 보도 방식을 놓고 고민이 적잖았다. 하지만 200자 원고지 400장 분량의 방대한 회의록을 몇 시간에 걸쳐 읽고 난 후, 독자들에게도 ‘날것 그대로’ 전달하자는 쪽으로 편집국 의견이 모아졌다. 적어도 <시사IN> 기자들의 독해에 따르면,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과 서상기 의원이 의원직을 걸고 주장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나 ‘국가 원수의 굴종’은 회의록에 없었다. 그런데도 보수 신문과 방송은 앞뒤 문맥 다 자르고 일부 입맛에 맞는 단어만 골라 여당 주장이 맞다고 대서특필을 한다. 하니, 이 회의록에 대한 <시사IN>의 관점은 기사에서 전하되, ‘팩트’에 대해서는 독자가 직접 읽고 판단케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이번 호 특별부록으로 긴급 제작한 데는 그런 취지가 담겨 있다. "

<출 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931 >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에 대한 유시민씨 해설 동영상 

클릭!! ==> http://www.ustream.tv/embed/recorded/35338553





연합뉴스 2007년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링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0842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0637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0640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0643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1125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0834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1177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0644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1198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064600001.HTML?from=search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6/25/0200000000AKR20130625127200001.HTML?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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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7. 2. 22:53 진실탐구

전주 덕진공원에는 오늘날 대한민국 법조인들이 표상으로 삼아야 할

유명한 법조인 3성의 기념동상이 위치해 있다.


기록을 위해 이 분들 관련 내용을 여기에 전재해 둔다.  



법조인 3인의 동상 (좌로 부터 바오로 김홍섭, 가인 김병로,화강 최대교)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1887-1964)





가인 김병로는 한말인 1887년 유학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소년시절에 유학자 전우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24세에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배워 법률가가 되었다. 한국인 신분으로 일본변호사시험에 응시자격을 얻지 못하고,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현 서울대 법대 전신)의 교수 및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 전신)의 강사로 법학을 강의하였다.


3.1독립운동 이후 총독부는 한국인에게도 교수경력이 있으면 판사자격을 인정해주어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운동을 하는 한국인의 재판을 맡을 수 없어 1년 만에 사직하고 변호사가 되어 수년간 애국적 민족변호사로 활약하였다. 


특히「형사공동연구회」를 조직하여 이인, 허헌 등 한국인 변호사들과 함께 일명 '항일 트리오'를 구성, 처음 의열단 김상옥 의사 사건에 공동 변호단을 구성한 이후 일제 시대 치안유지법 관련이나 기타 '불령선인'들이 연루된 굵직한 사건들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으며 6.10 만세, 신간회, 안창호 등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에서 '조선 공산당' 사건에 이르기까지 열혈 인권 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렸다. 또한 북풍회의 창설을 비롯하여 이상재, 안재홍 등과 함께 신간회를 조직하여 직접적인 민족항쟁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져 변호사 생활도 계속하지 못하고 경기도 양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해방까지 13년간 칩거하였다.


해방이후 대한민국 초대 법원장에 임명된 김병로 선생은 지금 법조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극도의 청빈한 삶으로 후대 법조인들에게 솔선 수범을 보였다. 법원 건물은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난방을 허락하지 않아 법원 직원들은 군용점퍼를 입고 언 잉크병을 숯불로 녹여 사무를 봤으며, 질좋은 외제 잉크를 쓰자는 요구에는 국산 잉크를 써야 나라경제가 산다며 국산품을 애용한 애국자였다.


또한 김병로 선생 스스로도 평소 연필은 3cm가 될때까지 쓰고 담배는 아예 반으로 잘라 파이프에 꽂아 피웠으며, 점심은 항상 자기 사무실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하면서 양복도 다른 판사들은 외제 양복을 입을 때 그는 홀로 국산 양복만 입었다. 김병로 선생은 이같이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당시 어지러운 정치 상황속에서 사법부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였다.


일례로 이승만의 독재가 극에 달했던 1952년, 이승만이 국회의원들을 버스째 납치한 뒤 개헌을 통과시켰던 ‘부산 개헌 파동’이 일어나자 김병로 선생은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며 불의한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사법부라는 확고한 신념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의 의도에 관계없이 주요 시국 사건에 대해 법원의 무죄판결이 연이어 내려지자 분노한 이승만이 불만을 토로하자 김병로 선생은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라”며 맞받아쳐 사법부의 기개를 드높였다.




고무신 검사 화강 최대교(1901-1992)




우리의 검찰사를 돌아볼 때 흔히 정의와 원칙 보다는 굴절과 오욕의 역사를 먼저 떠올린다. 그만큼 우리의 현대사가 정치적 격변이었고 검찰도 그 장단에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때로 정권의 압력에 굴신(屈身)의 자세를 보였고 또 때로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의를 외면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공명정대한 검찰권 행사를 위해 「잘 나가는 자리」를 먼지처럼 털어버린 분도 있었다. 화강(華岡) 최대교(1901∼1992). 


그는 우리 검찰사에 청렴강직의 표상으로 남아있는 신화같은 존재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이름 앞에는 「검찰의 양심」「대쪽같은 검사」「누룽지 검사장」「고무신 검사장」「최(崔」고집」「한국의 피에트로(이탈리아의 추상같고 깨끗한 검사)」라는 별칭이 따라 붙는다. 

최대교는 18년의 검찰생활 동안 자의로 사표를 세번 던졌다. 매번 엄정한 검찰권과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1949년 초대 서울지검 검사장 시절. 당시 정인보(鄭寅普) 감찰위원장으로 부터 한장의 고발장이 날아 들었다. 현직 임영신(任永信) 상공부 장관이 1948년12월 경북 안동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상공부 직할 적산 메리야스 공장 관리인으로 부터 2백70만환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음해 3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생일 기념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현금 5백95만환을 조선전업을 비롯한 산하단체에서 거둔 혐의였다. 그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임장관을 수양딸 처럼 생각했던 李대통령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을 통해 수사중단 압력을 가해 왔다. 현직 장관이 뇌물을 받았다고 하면 미국이 원조를 끊을 것이니 국가의 장래를 위해 수사를 중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여성단체들도 성명을 내고 유일한 여성장관을 엄호했다. 그러나 최검사장은 만약 뇌물을 받은 장관을 처벌하지 않으면 오히려 미국의 원조가 끊길 것이라며 기소할 뜻을 비쳤다. 이렇게 되자 법무부 장관으로 부터 정식 공문이 날아 왔다. 장관 도지사 판사 검사 등에 대한 범죄를 기소할 때는 장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통첩이었다. 이와 함께 이 사건을 「기소유예 하라」는 지시도 함께 내려 왔다. 


이에 대해 최검사장은 검찰총장을 경유, 즉시 회신을 보냈다. 「형사소송법상 기소 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전속권한이며 법무부 장관이 검사의 구체적 사건에 간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곧 바로 현직 장관을 불러 직접 10시간 넘게 조사한 뒤 배임 및 배임교사, 수뢰등 혐의로 기소해 버렸다. 법원은 이례적으로 특별재판부를 구성, 관련 피고인 대부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任피고인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최검사장은 깨끗이 사표를 던졌다. 


같은 해 6월에 발생한 김구(金九)선생 암살사건 때도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 배후관계를 둘러싸고 끝없는 의구심이 일었다. 암살범 안두희(安斗熙)가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헌병사령부에서 수사를 맡은데다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을 김구선생이 당수로 있던 한독당의 내분으로 몰아 갔다. 


경무대는 한독당원 7명에 대한 영장신청을 검사장을 제쳐 놓고 검찰총장이 서울지방법원장에게 직접 하도록 했다. 최검사장의 성품을 아는 李대통령이 그에게는 일체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이웃 관사에 있던 법원장으로 부터 우연히 이를 전해들은 최검사장은 사표를 써들고 검찰총장을 찾아갔다 


최검사장은 일본통치하 초임검사 시절부터 옳다고 믿는 일에는 서슴없이 자리를 내던질 정도로 소신이 뚜렷했다. 그가 부산지검 검사시절 사표를 던져 총독부의 압력을 물리친 일화는 널리 퍼져, 조선 법조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때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 절도 피의자를 때려 숨지게 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총독부 경무국은 법무국을 통해 담당검사인 그에게 기소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해 왔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인 순사에 대한 기소장과 자신의 사표를 동시에 검사정(檢事正·지금의 검사장)에게 올리고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그 순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경찰서에 가서 일본인 순사를 조사하기에 앞서 입회서기에게 미리 빵 2개를 사두도록 했다. 경찰서장이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그를 초대했지만 그는 빵 2개로 요기를 하며 조사를 마쳤다. 이같이 깨끗한 그의 몸가짐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가짐 뿐아니라 가족이나 친인척에게도 한점의 얼룩이 튀는 걸 꺼렸다. 1962년 제15회 고등고시 형사소송법 담당 고시위원으로 임명받았을 때였다. 전 해에 1차 시험만 붙고 2차에 떨어졌던 큰 아들 종백(鍾伯·당시 22세로 연대 법학과 4년)씨가 사법과에 응시한 상태였다.


그는 내각 사무처장 앞으로 고시위원 사직서를 우송했다. 혹시라도 출제나 채점에 사사로운 부자의 정이 생길까 두려워 아예 고시위원을 사퇴한 것이다. 그는 또 정읍 지청장으로 있던 일제 때 시골에서 씨암탉을 들고 관사를 찾아온 동생에게 『속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뇌물인줄 알테니 앞으로는 빈손으로 오라』고 나무라 동생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처럼 청렴하다 보니 그의 생활은 고달팠다. 일제때부터 전근을 많이 다녀 2남4녀의 자녀를 낳은 곳이 각기 다를 정도였고 40년 넘게 28평짜리 낡은 한옥에서 살아야 했다. 정부수립후 검사장 봉급이 1만7천환 이었으나 그것으로는 쌀 한가마도 사기 힘들었다. 그래서 부인 최기효(崔基孝) 여사를 비롯 가족들은 봉투를 만들어 내다 팔았고, 서울중에 다니던 종백씨는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수업시간에 집으로 쫓겨 오기도 했다. 


최검사장은 이 무렵 도시락 대신 누룽지를 갖고 출근, 사무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남모르게 먹었다. 어느날 직원과 기자들에게 이 장면을 들켜 누룽지 검사장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6·25 사변후 부산 피난시절에는 고무신 좌우짝을 바꿔가며 신었고, 서울고검 검사장 시절에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관용차를 탈수 없다하여 집에서 걸어서 출근하곤 했다. 

이처럼 일생을 청렴과 결백, 근검과 절약으로 일관하면서도 동네 꼬마들에게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상한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使徒法官 김홍섭(1915~1965)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와 함께 법조계의 사표가 되는 또다른 인물이 김제 원평 출신의 김홍섭 판사다. 지난 95년 MBC가 5대 도시에 재직하는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도 김홍섭 판사(41.4%)는 김병로 대법원장(46.2%)과 함께 법조계 「가장 존경받는 선배」로 꼽혔다. 서울고등법원장 재직시인 1965년 만 50세의 나이에 별세한 김판사가 지금까지 후배 법관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갖고 재판에 임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항상 구도하는 자세로 재판에 임했던 사실은 그가 남긴 수필집 「무상을 넘어서」(1960년)에 잘 나타나 있다. 가톨릭으로의 개종담과 여행담 등 25편의 글로 묶어진 이 책은 그 자신 구도의 길과 재판 과정에서 겪는 인간적 고뇌를 솔직담백하게 그려 가톨릭 교인과 법조지망생들에게 이미 널리 익힌 베스트셀러다. 


여기서 그는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 과거 이 물음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 뒤 스스로 법복을 벗었지만 이번에는 법은 불가불 필요한 것이며 재판은 최소한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없을 수 없는 것으로 긍정하는 답을 냈다.


임상 경험이 깊어지는 의사가 차츰 진료와 투약에 겁을 먹는 데 비유해 법 적용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과녁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에 비유해 모두 백발백중 할 수 없고 대신 얼마만큼 중심부에 접근하도록 던질 수 있느냐라는 글도 법관으로서 흔히 범하기 쉬운 독선과 자기 과신 대신 지극히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재직하는 동안 직장이나 동료에게 폐가 되거나 불명예를 끼치는 일은 않을 것, 적당한 보수 외에 어떤 불의의 이득을 탐하거나 특권 의식을 부려 지탄받는 일을 회피할 것, 기질과 역중에 맞는 자리를 골라 옮기도록 할 것」 등을 스스로 다짐하고 이 자세를 그는 재직기간 끝까지 충실히 지켰다. 


가난한 법관의 삶은 전주지방법원장 취임 때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고무신과 작업복 차림에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인 그에게 제대로 된 양복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향 법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외투 하나 없이 가서야 될 말이냐는 지인에게 이끌려 외투를 사서 덮어 씌워주었다고 후에 회고했다. 


그의 청렴도는 남의 원조를 받는 것이 자신의 「수도생활」에 지장이 된다며 처가에서 보내준 쌀가마니 마저 되돌려보낼 정도였다 한다. 


김홍섭에게는 「사형수의 대부」라는 또하나의 별칭이 따라다닌다. 생전에 많은 사형수를 찾아다니며 이들을 가톨릭으로 안내해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회의적이었지만 실정법상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선고하더라도 사형수를 종교적으로 구원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총애하던 육군특무대장 김창룡을 살해한 주범 허태영 대령과의 영적 교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 관련 사건을 재판하다 이미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허대령을 참고인으로 부른 것이 인연이 돼 면회와 서신을 교환하며 그의 대부(代父)가 됐다. 허대령은 사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길에서 자신의 행동은 역사가 밝혀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김홍섭 판사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1965년 간암으로 별세한 김판사의 장례식장에는 10여명의 사형수 대자(代子) 사진이 고인의 유영과 함께 걸렸다. 사형수의 교화에 열정을 쏟은 것은 판사라는 직위를 떠나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는 어려서 개신교에 입문해 불교를 거치는 방황 끝에 가톨릭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전주법원장 재직시에 그가 틈나는 대로 찾았던 곳도 순교자들이 묻힌 치명자산이었다. 그의 삶과 재판 과정에 깊은 구도자적 자세가 스며있는 사례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국가주의다. 인류보다 자기 국민을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모두가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는 고로 악이다」라는 1959년 수첩에 적힌 메모나 「기본인권은 법의 위에 있고 인류의 공동 운명은 민족의 그것보다 크다고 보는 것은 나의 법관으로서 기본 신조다」라는 1960년 메모 내용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앙과 함께 청빈한 법관 생활을 하게 한 또다른 일화도 있다. 전주법원장으로 부임한 뒤 그는 자신이 다녔던 원평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용인으로 일하던 최생원(본명 최상근씨)에게 공손히 절을 했는 데 최씨가 어리둥절해 하더라는 것이다. 사연인즉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이 아껴하던 사택에 있던 매실을 친구들과 따먹은 뒤 모두 도망가고 혼자만 붙잡혀 교장실에 꿇린 채 혼이 났다 한다.


자신을 붙잡아 간 사람이 바로 그 생원이었으며, 그 일로 평생 깨끗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것. 오늘의 자신이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신의 덕이다라는 말을 최영근씨로부터 들었다고 원평에 붙박이로 살아온 향토사학자 최순식씨가 기억하고 있다. 


소년 시절 법률가가 되기 위해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던 전주에 사법의 어른으로 부임한 그는 1년여 짧은 근무 기간이지만 많은 직원들이 울면서 이별할 정도로 따뜻한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한다. 


가인이 「앞으로 대법원장이 될 사람은 김홍섭 뿐이다」고 말했을 정도로 아껴했던 그는 그러나 지병인 간암으로 50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추모와 재조명 작업은 오늘에까지 이어지며 법조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서울대 최종고 교수는 「사도법관 김홍섭」이란 본격적인 연구서에서 그를 「한국 법조계의 태양이다」고 스스럼없이 규정했고, 그에게 「사도법관」(장면 전 총리) 「한국 법조인의 기둥」(조진만 전 대법원장) 「절망의 생명을 어루만지던 대부」(한승헌 현 감사원장) 「생명의 외경을 안 휴머니스트 법관」(한국일보) 등 수많은 헌사가 쏟아졌다. 





posted by 백발노인
2013. 7. 1. 22:02 진실탐구

U.S. Open에서 한국 여자골퍼들의 선전을 보면 즐겁더만

NLL 논쟁으로 국익은 안중에도 없고 당리당략만 앞세우는

찌질이 새끼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화악 잡친다.


언더파를 친 3선수, 그래서 1,2,3위를 한 선수는 바로 한국의 낭자들.

이게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한  U.S. Open의 결과로서 LPGA 공식 홈페이지 리더보드에 

우리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나란히 올라온 것을 보고

가슴이 뿌듯해 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근데 국익보다는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정치판의 몇몇 쓰레기들은  

정작 문재인 의원의  NLL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제대로 밝혀보자는 제안에

헛소리로 대꾸해 대는 모습을 보이며 궁민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어

정말 기분을 드럽게 잡치게 하고 있으니....


며칠전 내가 백령도 방문시 보았던 NLL의 실상을 이곳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새누리당 의원들도 중국어선들이 NLL부근에서 싹쓸이 조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어민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드만.



 출처 : 아이앰피터 ( http://impeter.tistory.com/2221 )



근데 이 새끼들은 이 지역을 공동 어로수역으로 정하자는 내용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하고 편집해서 마치 NLL을 포기한 것처럼 선전해 대고

조중동 쓰레기들도 이에 발맞춰 아둔한 궁민들을 현혹해 온 것이다.


쓰레기 정치인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말꼬투리 잡기에 혈안되어 왔었고

그것도 국정원에서 조작한 내용의 발췌록에 근거했다는 사실 등은

인터넷 검색을 한참 해 봐야 알아낼 수 있는 실정이니 

궁민들이 헷갈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쯧....





상세기사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493



* 오늘 인용한 두 개의 링크만 클릭해서 읽어 보아도 

   NLL 논쟁에 관련된 핵심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듯... 


출처 : 아이앰피터 ( http://impeter.tistory.com/2221 )

상세기사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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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6. 27. 22:12 진실탐구

요즈음 음주운전을 할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어제는 장수에 다녀 오면서 음주운전 할 일이 생기더니

오늘도 음주운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사정에 처했다.


음주운전은 크나큰 범죄행위이다.

적어도 우리는 각종 매체나 주변에서 들은 교육때문에 이건 안다.

그래 앞으로는 음주운전을 절대 하지 말자.


그래!!

음주운전 하지 말기....


머... 여러 이야기 적어야 되는 데

오늘은 술도 취했고 이만 자야겠다.

며칠전 스크랩해 두었던 글 하나 올리고...



--------------------------------------

[한겨레]"수사권 조정, 청장님 덕에 물 건너가겠군요"


"대통령-경찰청장-서장-일선 경찰의 연쇄적 갑을관계가 우리를 망쳤다"


청장님, 많이 당황하셨죠? 재임 시절 국민에게 공감받는 치안 서비스를 그토록 주장하셨는데 공감은커녕 많은 국민에게 공분의 대상이 되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우시겠습니까. 퇴임 이후 서울과 대구에서 출판기념회까지 열며 저희에게 "새 출발을 응원해달라"고 문자메시지도 보내셨는데, 이제 그 새 출발을 재판정 피고인석에서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견디기 어려우실 겁니다.

엄정한 법집행은 주폭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나

 

그런데 청장님, 지난 14일 검찰에서 발표한 수사 결과 발표문을 읽는 저도 참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발표문을 읽다가 심장이 두근거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와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재임 시절 그렇게 강조하셨던 지휘 철학 '엄정한 법집행'은 '주폭'과 공원 노숙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나요? 또 다른 지휘 철학인 '협력'은 국정원과의 협력을 의미한 것이었나요?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참, 청장님이 내신 책 제목이기도 하죠? 책은 많이 팔렸나요? 청장님 재임 시절 서울청 대부분의 간부가 손에 들고 다녔으니 그것만 해도 변호사비는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고받은 내용만 갖고 수사하니까 주폭이 근절되지 않는 거라고, 신고 내용에 국한하지 말고 숨어 있는 피해자까지 낱낱이 찾아내 구속시켜야 한다고 지시하셨지요.

국정원 사건에서도 숨어 있는 댓글을 낱낱이 찾으려면 키워드 100개는 고사하고 1천 개로 검색해도 모자랐을 겁니다. 고발 내용에만 국한하지 않았다면 검찰 수사로 이렇게 개망신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경찰 수사의 '흑역사'는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더불어김용판이 장식할 것이란 말까지 나돕니다. 한 개인의 잘못된 판단으로 11만 경찰 구성원들을 시궁창에 넣어버렸다는 비난도 있습니다. 청장님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내딛고 있는 수사권 조정은 '개나 줘버리라'는 국민의 야유에 직면해 있습니다. 청장님께서 정치권과 밀거래를 했다는 소문의 진실도 차차 밝혀지겠지요.

청장님께서는 '검찰이 짜맞추기 수사로 나를 천하의 흉적으로 몰고 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시더군요. 그런데 아무리 억울하신들 저희보다 억울하시겠습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면서, 묵묵히 경찰 업무만 수행해온 저희가 갑자기 국기 문란의 조연이 돼버렸으니 말입니다. 사실 청장님이 뭘 시키든 충실히 이행했던 저희 아닙니까. 청장님이 하나만 말해도 열을 알아서 해주는 충직한 부하였습니다.

청장님이 주폭 척결을 외치자마자 한 달 만에 100여 명을 구속시켰지요. '경찰관 음주운전금지'를 명하셨을 땐 단체로 일어나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며 '음주운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기도 했지요. 청장님이 시를 좋아하신다는 이유로 아침 회의 석상에서 너도나도 일어나 시를 외우는 곳이 서울경찰청이었습니다. 청장님이 강조하신 말씀을 청동으로 조각해 서울경찰청 벽면에 부착할 정도이니 얼마나 흐뭇하셨겠습니까.

시 좋아하는 당신 위해 아침마다 시 읊던 간부들

그런데요, 청장님. 청장님이 모르신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청장님이 좋아하시는 시를 외우는 간부들을 쳐다보며 "저런 배알도 없는 인간"이라 비웃었고, 청장님 말씀을 새긴 청동 부조를 보면서는 "청장 바뀌면 없어지겠군" 추측했습니다. 심야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국정원 수사 결과 발표를 접한 직원들이 "중대한 사안이라 신속하게 발표한다"는 청장님의 말씀을 정말 믿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청장님 앞에서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정말 저희에게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던가요?

몇몇 간부는 청장님의 불법 (또는 최소한 부당한) 지시에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동참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뭔가 이상하다'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다만 말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저희는 상급자의 지시에 "예, 알겠습니다"라고 복창하는 것에 익숙할 뿐 "안 되는데요"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배운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으니까요. 아마 청장님은 저희가 만만하셨을 겁니다. 청장님의 어떤 지시에도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리고 실제 그리 됐던 것 같습니다.

불만이 있으면서 왜 말을 안 하냐고요? 저희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습니다. 기껏 용기 내어 '그건 아닌데요'라고 말해봤자 조직 내 '진상'으로 낙인찍힐 뿐이죠. 진상이 되고도 용기를 접지 않으면 결국 징계나 파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찌라시' 정보를 너무 사랑하셔서 청장님처럼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계시는 조현오 전임 청장님을 기억하시지요? 그분이 갑자기 '실적주의'를 도입하며 전국 경찰관을 못살게 굴 때 반대 의견을 표시한 경찰관들은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파면됐습니다. 청장님들이야 퇴임 뒤 또 다른 공직에 취임할 수도 있고, 그게 안 되면 대기업 고문으로도 갈 수 있지만, 저희 같은 하위직들은 어디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저희는 윗사람에게 찍히면 끝입니다. 승진이든 인사든 징계든 모든 게 서장님, 지방청장님, 본청장님 마음먹은 대로이니 저희가 어떻게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청장님은 저희에게 속으신 겁니다. 청장님 칭송이 자자하고, 청장님이 하시는 말씀은 성경 구절이 되며, 청장님의 생각은 솔로몬의 판단이 될 지경이니 청장님도 속으실 만하지요. 그러니 정말 억울하시겠습니다. 청장님의 잘못이라면 직원들의 침묵을 찬성으로 받아들이고 몇몇 간부의 아첨을 직언으로 받아들인 것뿐인데, 조직을 팔아먹은 천하의 '배신남'으로 낙인찍혔으니 얼마나 억울하시겠습니까.

용기있게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

이 억울함을 벗어날 길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의 후속으로 <청장이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를 출간하시는 겁니다. 청장님의 의견에 용기 있게 반대하는 경찰관, 혹은 마음속으로만 불만을 삭혀온 많은 하위직 경찰관이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조직, 정책결정자의 참모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조직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힘써주시는 것 말입니다.

아마 청장님도 어떤 점에선 어쩔 수 없으셨겠지요. 청장님에게도 '절대 갑'인 대통령이 있었을 테니까요.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임명하도록 돼 있으니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톡 까놓고 이야기하시죠. 법률상 동의를 얻게 돼 있는 경찰위원회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시민의 뜻보다는 절대갑의 심중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집에서 기르는 개도 밥 주는 주인을 알아보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왜 안 그렇겠습니까.

어디 청장님뿐이겠습니까? 지금도 청장이라는 고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많은 경찰관들이 갑의 심중을 읽어내는 데 전심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수많은 전임 청장이 그랬고, 앞으로의 청장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대통령을 정점으로 경찰청장, 지방청장, 서장, 최일선 경찰관들까지 한 줄로 연결된 수많은 '갑'과 '을'의 릴레이에서 자유로운 경찰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청장님도 중앙집권적 경찰 구조의 희생양이면서 하의상달이 막힌 비민주적 경찰조직의 일원이었을 뿐인데 '천하의 흉적'으로 몰리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지시겠지요. 청장님이 시민의 뜻에 따라 시민의 손으로 임명된 서울청장이었다면, 한 사람만 바라보며 경찰 생활을 하다 시궁창에 빠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진 마십시오. 언젠가는 절대갑을 위해 충성하는 경찰이 아닌 시민의 손으로 임명하고 시민의 뜻으로 운영되는 경찰로 거듭나는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경찰관들이 상급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률과 양심에 따라 법을 집행하고, 토의와 토론을 거쳐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경찰, 언젠가는 우리 국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청장님처럼 불행한 서울청장이 다시는 나오지 않는 날 말입니다.

경찰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 청장님이시니, 비록 퇴임하셨지만 그런 경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날이 오면, 청장님과 함께, 다시 한번 외쳐보고 싶습니다. 존·엄·협·공('존중·엄정·협력·공감'을 뜻하는 김용판 전 청장의 지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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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