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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9. 15:05 진실탐구


이순신에 대해서는 어떤 호칭이 어울릴까? 초중학교 시절 단체로 관람한 영화중에 이순신장군 관련 영화가 있었으며 그중 '성웅 이순신'이라는 영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  맞다. 이순신은 성인+영웅을 의미하는 성웅이라는 호칭이 제격일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은 정말 훌륭한 인물이다. 나이들어서 당시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면서 선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꼬락서니에 울화통이 터지는 반면 이순신은 상대적으로 더더욱 훌륭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한 때 카톡으로 얻어들은 얕은 지식으로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이 여러 여자들과 난잡하게 성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이순신이 聖雄이 아닌 性雄이라는 이야기를 떠벌리던 녀석들이 많았었다. 대충 아래와 같은 부류의 녀석들이다. 아이디가 '혁신한국' 이라니 더욱 기가 막히다. 




글쓴이 : 혁신한국   2015-03-21 18:37:24 121.174.*.*

제목 : 고전번역원을 모르는 애들도 있었네..ㅋㅋㅋ 이순신 난잡한 성관계도


고전번역원 자료중에 이충무공전서로 검색하면 거기에 포함된 자료에 난중일기가 있다그 난중일기를 번역해서 나온 책이 교감완역 난중일기이고 거기서 나온게 이순신이 여진이라는 계집과 떡친 얘기세명의 계집과 떡친 얘기들이 나왔느니라어제 어떤 새끼가 난중일기에 그런 기록 없다고 개소리를 하는데반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자기 나라 역사를 쥐 좆만큼도 모르면 난중일기에 날짜까지 다 나와서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없다고 쳐 말하겠냐?  이순신이 떡 치는거 좋아했다는게 쪽팔리나마누라가 두명첩이 두명인 것도 모르고 살겠네?

 



역사는 혼자 다 아는 척 하면서 제대로 된 판단력이 없다. 대개 이런 놈들일 수록 난중일기를 읽은 녀석도 아니며 또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녀석이 못된다. 나 역시 '그런 사실이 있었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아니라고 반박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며 군무에 시달리는 장수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몇몇 계집종들과 성적인 접촉을 했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그동안 인터넷상에서는 상당히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러가지 정황에 비추어 보아 처음부터 몇몇 오역에 의한 인간의 못된 상상력이 덧붙여지면서 침소봉대식 해석으로 발전된 오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특히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에 묘사된 장면은 작가의 상상력에 문장력까지 발휘되어 가히 최고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물로 그것이 왜곡의 극치가 되고 말았지만...   



나는 병신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진을 품었다. (여진은 그 술상을 들고 들어온 관기였다그때 서른 살이라고 했다기생이라기보다는 관노에 가까웠다. (정자나무에 매단 머리들의 뜬눈을 생각하면서 그날 밤 나는 여진을 품었다그 머리들이 내 몸을 여진의 몸속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그 여자의 몸속은 따뜻하고 조붓했다오랫동안 뒷물하지 않은 여자의 날비린내 속에서 내 몸은 나로부터 아득해져 갔고또 돌아왔다그 여자의 몸은 쉽게 수줍음을 버렸다그 여자의 몸은 출렁거리며 나에게 넘쳐왔다.” 

-‘칼의 노래’ 중에서





최초의 난중일기 번역자가 해석이 어려워 머뭇거리던 부분을 영문번역 과정을 거쳐 그 부분에 (비루한) 인간의 상상력이 덧붙혀 지면서 이순신 장군의 성관계 내용이 구체화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나의 진영()이라는 의미의 여진이 이두식으로 표현된 여진(女眞)이라는 단어를 계집종 또는 여진족 여자 라는 의미로 해석해 이런 오해가 벌어지게 된 것 같다는 해석이 이해가 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순신 장군의 평소 품행으로 보나 인격으로 보나 그럴 사람은 아니며 더구나 자신이 후대에 사료를 남기기 위해 적은 난중일기에 적지 않아도 될 사소한 내용을 그렇게 적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중도일보의 기사 내용


“난중일기 여진은 여성아닌 군사”
이순신 연구가 이용호 박사 오역 지적 “평가절하 안타깝다”

기사입력 : 2011-04-27 18:13       지면 게재일자 : 2011-04-28     면번호 : 7면


28일 제466회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일을 맞아 이순신 연구가인 이용호(75․전 명지대 교수)박사가 난중일기 오역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 박사는 지난 2005년에 이어 2009년 난중일기 번역본과 난중일기 영인본 액자를 사재를 털어 출간할 정도로 충무공정신 확산에 애착을 가진 학자다.

2001년 일본에서 기타지마(북도만지)번역본을 보고 우리도 난중일기를 일본을 능가하는 최고 작품으로 번역하자는 마음으로 그동안 번역된 난중일기를 수집 조사하기 시작한 이 박사는 “난중일기를 수십 번 읽으며 충무공의 뛰어난 전략과 위대함 못지않게 법과 원칙을 지키고 국가와 민족을 우선하는 깊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미 지난 2001년 난중일기를 번역해 자위대와 육군, 해군사관학교의 필독서로 활용하고 일본 전역에 설치된 마을문고에 비치해 주민들에게 읽힐 정도인데 우리나라 번역서와 영문본에 오역이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이 박사가 지적하는 난중일기의 중요한 오역은 ‘여진(女眞)’인데 1977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발행한 영문판에 여진을 여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여진은 여성이 아니라 ‘여진(余陣)’으로 ‘내 진영(陣營)’이다. 일기 옆 빈 공간에 적힌 여진을 일부 번역자들이 여성 이름으로 오역해 “여진과 함께 잤다”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진(女眞)’과 ‘여진(女眞)20’부분이 연세대에서 발행한 영문판에 “the night with chin(친과 함께 자다)”과 “spent the second night with chin(친과 함께 두 번째 밤을 보냈다)”으로 오역됐다. ‘여진’은 ‘내 군대(진영)’이며 ‘여진20’은 ‘군사 20명’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이 박사는 “석세(石世)를 돌세로 읽는 것처럼 충무공은 이두(吏讀)를 많이 사용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안될 전쟁터에서의 기록에 본인만 알 수 있도록 이두로 적은 것이며 이후 정조 때 판각에서는 후대의 오역을 막기 위해 아예 지워버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해 놓은 난중일기를 보면 병신년(1591년) 9월 12일 일기에 “晩出登途 十里許川邊 李光輔與韓汝璟佩酒來待 故下馬同話 安世熙亦到 暮到茂長(늦게 길을 떠나 10리쯤의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갖고 와서 기다리고 있기에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했다. 안세희도 역시 도착했다. 저물어서야 무장에 도착했다”로 적혀 있고 14일에는 “又留(하루 더 머물렀다)”고 돼 있다. 이 일기 여백 부분에 적힌 ‘女眞’과 ‘女眞20’을 진이란 여성과 하룻밤을 지내고 둘째 날을 묵었다고 해석한 것은 오류라는 게 이 박사의 지적이다.


그는 또 “이런 잘못된 번역서가 외국으로 흘러가 또 다른 오역이 생기는 것”이라며 “소설이기는 하지만 대중적 인기가 높은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도 ‘병인년 가을 여진을 덮치다’라고 표현해 성웅 이순신을 평가절하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현충사 송대성 기획운영과장은 “현충사 소장 난중일기에 여진과 여진 20, 여진 30이라고 적힌 부분이 있다”며 “이는 전란 중 충무공이 자신만의 암호를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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