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6. 17:09
여행잡담
내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간것이 2011년경이다. 당시 현대자동차의 공장이 푸틴의 고향이라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지는 것을 계기로 업무출장을 간 것인데 그 곳에 간김에 황제의 여름별장이나 겨울별장, 에르타미주 박물관 등을 방문하였다. 이태리 로마에 버금가는 관광지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볼만한 곳을 왜 그리 늦게 알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곳에 갔을 때 구한말 우리나라의 사절단이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는 데 대관식이 열리는 홀 (아마도 에르타미쥬 박물관에 있었던 홀로 기억된다.)에는 입장하지 못했다는 말과 함께 사절단 일행이 겪은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사절단의 대표였던 민영환이 자신의 세계일주기를 쓴 책이 '해천추범'이라는 것도그 때 들었다. 오늘 우연히 매일경제를 읽다가 해천추범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어서 여기 소개해 본다.
[世智園] 해천추범(海天秋帆)
1896년 민영환 특사가 수행원 윤치호와 역관 김득련 등을 대동하고 장도에 올랐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한 사절단이었다.
상하이에 첫발을 디딘 뒤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거쳐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북미대륙에서는 위니펙과 몬트리올을 경유해 뉴욕에 이른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영국 상선 루카니아호로 영국 리버풀로 옮겨간 일행은 베를린과 바르샤바, 모스크바를 거쳐 대관식이 열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한다. 제물포항을 출발한 지 50일 만이다.
고생 끝에 왔건만 대관예식을 거행한 성당엔 들어가지 못했다. 관모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세상물정을 그렇게 몰랐다. 밴쿠버의 호텔에서 난생처음 본 엘리베이터를 민영환은 이렇게 기술했다. "5층 건물 오르고 내리기 쉽지 않은 것을 헤아려 아래층에 한 칸의 집을 마련해 전기로 마음대로 오르내리니 기막힌 생각이다."
서구 문물을 실컷 구경한 민영환 일행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흑룡강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 뒤 다시 배를 타고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204일간 11개국을 돈 대장정은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사상 최초의 세계일주였다. 민영환은 이때의 기행문을 해천추범(海天秋帆)이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는 뜻이다. 1897년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사절단으로도 다녀왔다.
17세에 과거급제 후 30대에 한성부윤,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 요직을 거친 민영환은 동학농민혁명군에게 맨 먼저 처단해야 할 수구대신으로 꼽혔을 정도였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서구 시찰 뒤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은 완전히 달라졌다. 근대화된 나라들의 선진제도 도입을 적극 주창했고 근대적 해군 양성을 부르짖었다. 결국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잃자 백성과 각국 공사들에게 울분을 토하는 유서를 돌리고 자결한 비운의 대한제국 관료였다.
생활 수준도 높아지고 관심 영역도 다양해지면서 사람들의 여행 방식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깃발여행은 옛말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한적하고 여유로운 곳을 더 선호한다. 오지를 찾아가는 자연탐험도 대세다. 여행이라는 뜻을 지닌 여러 곳을 두루 다녀본다는 경섭(經涉)이나 다른 곳을 찾아간다는 정행(征行) 등의 표현도 모두 하나로 모아진다. 일상과는 다름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번 주말엔 봄바람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길에 나서보자.
[윤경호 논설위원] 매일경제 2015.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