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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6. 12:30 카테고리 없음
우연한 기회에 시인 백석에  대해 알게 되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일제시대 시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일본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준수한 외모와 당시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뭇여인의 흠모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 해방이 되면서 북에 남게 되자 남한에서는 좌경으로 볼리어 그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북한에서는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다가 서글픈 말년을 맞았다 한다. 

70년대 삼청각과 함께 한국 요정정치를 주름잡았던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여사가 평생을 기다리며 사랑했던 인물로 김영한 여사는 임종에 이르러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함으로써 오늘날 길상사가 되었다고.. 이번 주말에는 길상사나 한번 둘러볼까 한다. 

일본 유학시절의 백석


인민증에 붙어있는 백석의 사진


<엔하위키미러에서 찾아본 백석 관련 내용>

백석 (白石, 1912년 7월 1일 ~ 1996년 1월).

한국의 시인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 일제강점기인 청년기에 문인으로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조만식 선생의 일을 도우면서 하필이면 북한에서 우익활동을 하는 바람에 문인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당하고, 1996년 타계하기까지 반평생을 영영 절필한 채로 보냈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에 잔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문학작품을 오랫동안 금서 취급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전에 남으로 내려올 기회는 있었을 텐데 그대로 북에서 잔류했던 이유는 알 수 없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첫번째 부인이 여기저기 연애질하고 다니던 백석을 증오하여 월남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별렀기 때문이라 하는데... 그 밖의 다른 이야기는 후술. 어쨌든 59년 이후 그는 정말로 삼수갑산 중 삼수로 가서 평생을 살았다.

사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생겼다. 게다가 키는 무려 185cm!!! 오오 백석 오오! 그에게 날아든 팬레터의 무게만 백석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백석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다. 통영을 아주 좋아했던 시인. 통영에 란이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하였던 어학의 천재라고 한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라 알려져있다.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 (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서북방언을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백석의 시 <국수>를 읽고 나서 국수가 땡겨서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었다는 사람도 있다(...).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구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6년임이 밝혀졌다.

대표적인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우난 곬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고독>, <여승>이 있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 데 백석의 상대로 김진세(백석의 제자)의 누이, 란(蘭), 자야(子夜)라고 불렸던 기생 출신 김진향 씨가 있다. 본명이 김영한으로 진향은 기명(기생의 호칭). 자야 여사가 호기심에 함흥 시내 번화가로 나들이 갔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히라다 백화점 책방에서 문예춘추, 여원, 자야오가라는 책을 사가지고 와서 백석 시인에게 보였는데 그때 지어준 이름으로 자야는 백석시인과 김진향 여사 사이에만 통하는 애칭이 되었다. 여담으로 은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해서 지금은 길상사 라는 절로 바뀌어 있다. 

당시 말 한 필이 오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이 원 정도였다고 한다.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의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자.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별 헤는 밤 - 윤동주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백석관련 프레시안 기사>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울던 백석

밀실 정치의 요람이었던 요정 대원각을 시주받아 법정 스님이 세운 절이 서울의 길상사다. 시주자는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 1912~1995)의 연인이었던 고(故) 김영한 여사다. 이 땅의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백석 시인은 기생이었던 그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자야'라는 애칭을 붙였다. 자야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 나타샤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백석과 헤어진 뒤 그녀는 백석을 그리며 평생 홀로 살았다고 한다.

자야는 책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이 사귄 다섯 여자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야였고 자신 또한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기생이었던 자야는 1936년 회식장소에 나갔다가 백석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에게 반한 백석은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말했으며 이후 사랑에 빠졌다고 증언했다.

자야의 믿음처럼 백석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그녀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그네는 백석의 시 속 나타샤란 여인이 자야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시란 게 원래 그렇다. 자야도 나타샤고 자야 전에 사랑한 여인도 나타샤고 자야 후에 만난 여인도 나타샤다. 사랑하는 여인이면 누구나 나타샤다. 스물넷, 청년 백석이 사랑한 나타샤는 '난'이라는 소녀였다. 

▲ 백석이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갈 때"도 떠 있었을 통영의 열이레 달. ⓒ이상희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줏 
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 골에 산다던데 
명정 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시(詩) <통영(統營) 2> 

이순신 장군 사당인 통영 충렬사 건너 쌈지공원에는 백석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에 새겨진 시는 <통영 2>다. 저 머나먼 북쪽 땅 정주가 고향인 백석 시비가 남쪽 끝자락 통영에 서 있는 이유는 뭘까. 다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나그네는 이 비석에 새겨진 시 <통영 2>를 볼 때마다 윤도현의 노래 <사랑 Two>가 떠오른다. <통영 2>가 아니라 <사랑 Two>로 읽으면 이해가 쉽다. 백석은 생애 참으로 많은 여인의 애간장을 태우고 다닌 사내였지만 통영의 여자 '난'에게는 도리어 큰 상처를 입었다. 

통영 출신 천희 '난'을 향한 사랑 


▲ 백석이 주저앉아 울먹이며 시를 썼던 충렬사 계단. ⓒ강제윤

<통영 2>는 서울 살던 백석이 난이란 여자를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 충렬사 입구 돌계단에 쪼그려 앉아 서글픈 심사로 쓴 것이다. 백석은 '통영'이란 제목의 세 시편을 남겼다. <통영 2>도 처음 발표 때는 제목이 '통영'이었다. 백석이 남쪽 끝 항구도시 통영에 대해 시를 세 편이나 남긴 것은 그만큼 그 여자 난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1935년 절친한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이화고녀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본명 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 <편지>에서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 산문 <편지> 中
 

난은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 잘 아는 사이였다. 백석은 내친김에 신현중과 함께 허준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나섰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된 <통영>이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통영>


1936년 1월 백석은 통영 출신의 천희 중 하나인 난을 만나기 위해 다시 통영을 방문한다. 통영에서는 아직도 처녀를 '천희' 혹은 '처니'라고 부른다. 하지만 통영 '천희'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 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린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앞서 언급한 <통영 2>다.

백석은 3월에도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한다. 대신 난의 외사촌 오빠 서병직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이때 쓴 시가 서병직에게 헌사한 <통영-남행시초 2>다.

"통영 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한 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서병직 씨에게" 
- <통영-남행시초2> 전문 

백석은 난을 만나지 못한 섭섭함을 술과 품바타령과 통영 시장 구경으로 달랬던가 보다. 또 한 번의 엇갈림, 하지만 사랑의 엇박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랑과 우정의 삼각 드라마 
1936년 12월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이때 상황은 2010년 통영시에서 발간한 <예향 통영>에 세밀히 나와 있어 인용한다.

"1937년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서상호는 통영 출신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통영의 유력자였다.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 2010년 통영시 발간 <예향 통영>에서 발췌 인용
 

백석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 백석 입장에서는 친구의 배신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백석은 후일 여러 글에서 믿었던 친구에게 버림받은 아픔을 토로한다. 이 시도 그 중 하나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中
 

친구가 자신을 버린 것도 아픔이지만 그보다는 연모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이 더 크지 않았겠는가. 그 상실감이 백석의 여러 시와 산문을 통해 드러난다. 통영에 왔을 때 백석도 그 시원한 대구국을 먹었던 기억이 깊게 남았든 모양이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흰 바람벽이 있어> 中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충렬사 건너 백석의 시비 앞에서 나그네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엇갈린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를 본다. 하긴 언제나 현실은 삶을 배신하기 일쑤다. 현실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어디 있으랴. 사랑 앞에서는 국경이 없다지만 사랑 앞에서는 우정 또한 없다. 고금에 사랑 때문에 친구끼리 등을 돌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백석의 친구 신현중 또한 난이를 연모했으니 어찌 그만을 탓하랴. 친구는 사랑의 전쟁터에서 승리한 것뿐이다! 

백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의 실패 덕분에 우리는 백석의 그 아름다운 시편들을 얻게 됐다. 난과의 사랑에 성공했다면 백석은 아마 통영에 정착해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아니라 혹 선원이나 선주가 되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빛나는 시인 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이 정작 백석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계관시인의 명성을 잃을지언정 연모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고 싶은 것이 남자가 아닌가. 

---------------<길상사 사진>-----------------------------


서울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길상사는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70년대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주인이었던 김영한이 송광사에 시주하여 사찰로 바뀐 곳이다. 1만여평의 이르는 넓은 부지위에 옛날 요정으로 사용하였던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최근에 일부 전각들을 신축하여 사찰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원이 잘 가꾸어진 사찰경내에는 울창한 수목들로 가득차 있고,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작은 개울이 정원의 풍광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은 월북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기생으로 70년대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운영했으며 만년에 법정의 무소유 철학에 감화를 받아서 수차례에 걸쳐 시주의사를 밝혔으나 법정이 거절하였다가 1997년에야 사찰로 바뀌었다고 한다. 법정이 만년을 보낸곳이기도 하며, 사찰경내에는 시자자인 김영한의 공덕비가 있다.


길상사는 요정으로 사용하던 건물들을 그대로 불전으로 사용하고 있기때문에 기존의 사찰과는 다른 건물구조와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큰 홀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을 개조한 주불전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최근에 신축한 지장전, 설법당, 크고 작은 별채들을 활용한 요사채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요정건물들이었던 크고 작은 요사채들은 도심속에서 어떻게 이런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풍광좋은 계곡에 마련한 조선시대 선비들의 별장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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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북악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인 길상사. 이 사찰은 70년대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이었던 곳으로 당시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때문에 전통 사찰과는 다른 건물배치를 보이고 있다. "서울 도심속에 이런 공간이 있었구나!"라는 느낌을 첫눈에 받은 아름답고 넓은 정원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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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성북동 주택가에 길상사는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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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는 별도의 천왕문을 세우지 않고 옛 대원각 정문을 그대로 사찰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각산 대원각'이라는 현판이 사찰 출입문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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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입구 왼쪽편에는 길상사로 바뀌면세운 지장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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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들어서면 원래 큰홀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을 주불전인 극락전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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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불전인 극락전 건물. 화강석 석재로 축대를 높게 쌓고 그 위에 'ㄷ'자 형태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사찰로 바뀌면선 문살등은 불전의 모습으로 바꾼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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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활엽수 수목들이 가득찬 길상사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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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맞아서 길상사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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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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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자락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가에 자리잡은 요사채 건물. 원래 요정 별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통 한옥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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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이 건물은 앞면 5칸 정도의 '-'자형 건물로 서울 도시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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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헌 옆으로 흘러 내려오는 작은 개울을 이용하여 아기자기하게 정원을 꾸며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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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서 크고 작은 별채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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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는 요사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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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묵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요사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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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에 위치한 요사채 건물. 묵언수행중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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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옥형태의 요사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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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 윗쪽으로 크고 작은 요사채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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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뒷편 수목이 울창한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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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이 좋은 사찰 앞쪽에는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건물이 있다. '설법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로 사찰을 찾은 신도들이 잠시 쉬거나 설법을 여는 사찰 강당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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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전 내부


posted by 백발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