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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3. 22:36 취미활동

우연한 기회에 SERI에서 제작한 '웃음과 역설의 향연- 열하일기'를 보았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씨가 차분한 목소리로 열하일기가 쓰여진 당시의 시대적 상황,

연암 박지원이라는 사람의 인물 됨됨이, 그리고 열하일기의 내용 등에 대해

아주 재미있고 알기쉽게 설명해 주는 동영상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실학파인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라는 책을 썼다는 것은 들어 왔지만

정작 그 구체적 내용이나 그 책의 의미 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 데

강의를 듣고 연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이 책을 통독해 볼 생각이 들었다.


출세길을 버리고 거리를 떠돌며 만인과 소통한 방랑자

자유분방한 사고로 구시대의 질서를 재정립하려던 혁신가였던

연암의 깊고 넓은 사고의 결과물인 열하일기는 일종의 여행기이다. 


요즈음 '걸어서 세계속으로' 라든가 Rudy Maxa의 '스마트 트래블' 류의 여행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 나로서는 반드시 읽어 보아야 할 책을 발견한 셈이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노론 가문의 일원으로서 과거를 치루어 출세길에 나섰으면

고위직 관료로서 세속적인 삶을 영위했을 법도 했건만 

자신의 삶을 재미있게 꾸려 나가보자는 관점에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개방적인 인식 및 

사물과 현상의 연관성을 탐구하려 노력한 점 등 

이즈음 내가 느끼고 있는 것과 매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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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12. 23. 01:00 진실탐구

영화 '변호인'을 봤다.

영화 첫머리에 '이 영화는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한 허구'라는 자막이 뜨지만

이 영화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주인공인 송우석 변호사는 고졸 출신에 돈만 밝히는 속물 변호사 였으나

과거 인연을 맺었던 국밥집 아들이 연루된 부림사건에 휘말리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고....


간략한 줄거리는 아래 동영상을 찍어 보면 잘 나와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qU4U46tXmBc




아무튼 2시간 남짓 긴 영화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 엮어진 영화였는 데 주인공인 '송우석'이란 이름은 

주연배우 '송'강호와 감독 양'우석' 을 합성한 것이래나.


이즈음 대한민국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다시금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상황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절규하는 송변의 대사가 

가슴을 울리는 시절이니 참 나라 꼴이라고는.. 쯧..쯧


분단된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빨갱이 때려잡는다는 명분하에 숨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저 거대한 악의 실체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공안정국이 다시 고개를 쳐드는 오늘의 현실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일요일 저녁 미사에 참석해서도

도대체 신이 존재하신다면 왜 이러한 꼴이 반복되는 지

계속 반문해 보았지만 역시 뾰족한 답은 구할 수 없었다. 


영화의 뒷이야기로 송변이 훗날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고

국밥집 아들  '진우'역의 실제인물인 송병곤씨가 노대통령에 대해 지은 추도문에서 

진우에 대한 뒷이야기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 이곳에 옮겨본다.



----<추 도 문>------

                                              송 병 곤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리는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은 1981년 여름 어느 날, 저는 부림사건의 피고인이었고, 당신은 변호인이었습니다. 제 나이 만 22세, 당신의 나이 35세. 이제 와서 나이를 헤아려보니 노 변호사님도 그때는 무척이나 젊었습니다. 


처음 노 변호사님을 접견했을 때 저는 변론을 거부했습니다. 나중에 자서전을 보니 노 변호사님은 제가 변론을 거부한 이유가 노 변호사님을 정보기관의 끄나풀로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더군요. 사실 그때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변호는 스스로 하겠다고, 필요없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노 변호사님은 성실한 변론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셨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하의 사법부는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징역 6년에서 1년6개월까지의 판결을 선고하였고, 저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부림사건 피고인들은 1983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기 시작하여 그해 연말까지 특사로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당감성당에서 송년회 겸 석방환영회가 개최되던 날, 이호철·노재열과 함께 노 변호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러 사무실로 찾아갔었지요.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해주던 당신을 따라 처음 갔던 사우나의 어색함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함께 당감성당의 환영회에 참석하였지요. 술기운이 오르고 막판 춤사위가 어우러지며 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당신이 추던 곱사춤도 기억합니다. 


저는 당신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1984년 4월부터 노무현 변호사사무실에서 직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어머님의 부탁이 있었다 하더군요. 첫 출근 날 영문도 모른 채 최병두 사무장님을 따라 간 곳은 맞춤양복점이었습니다. 치수를 재는 재단사에게 몸을 맡기고 있자니 사무장님이 “변호사님이 양복 한 벌 맞춰주라고 하더라” 하시더군요. 그렇게 따뜻하고 산뜻한 양복 한 벌 얻어 입고 사무실 직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직원들의 교육과 소양을 위해 매일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민법을 강의했고, 민사소송법까지 강의한 후에야 아침 교육을 종료하였습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의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아침 8시에 출근을 하니까 강의시간에 졸리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강사인 노 변호사님의 노력과 열정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노 변호사님의 제안으로 1984년 말부터 1985년 초까지 준비해 노동법률상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이후 노동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후배들과 사무실에서 우연하게 전태일 열사의 제사를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전국 최초의 노동법률상담소였습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당신과 함께 전 직원이 올랐다가 보았던 지리산 세석에 걸린 엷은 구름이 그립습니다. 당시 따로 개업하고 계시던 문재인 변호사님의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에 올랐다가 하산 길에 길을 잃어 고생한 기억도 생생합니다. 


민주화운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제가 사무실의 참한 여직원(지금은 저의 집사람이 되었네요)과 함께 중부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보수동 2파출소로 연행되었을 때, 여직원의 연락을 받고 즉시 달려와 주었던 당신의 모습도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경찰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당신을 처음 보았습니다. 노 변호사님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함께 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당신은 분을 참지 못하고 운전을 하던 노주사님에게 불법 유턴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앞에 교통경찰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교통법규 위반으로 딱지를 받게 되었고, 뒤늦게 법조인의 차량이란 걸 알게 된 교통경찰들이 끈질긴 추적(?) 끝에 사무실까지 찾아와 ‘변호사인 줄 모르고 딱지를 발부하였다’고 오히려 미안해하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했는데도 당신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추억이 쌓이고 노동법률상담소가 확고히 자리를 잡아갈 즈음인 1985년 말, 저는 잘하지는 못하지만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고자 하는 미련 때문에 노 변호사님의 사무실을 그만두었습니다. 당시 노 변호사님의 심정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냥 노 변호사님은 자신이 좋아했던 저의 친구 두 명(이호철과 이성조, 당시 부산민주화운동협의회에서 실무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과 함께 근사한 회식 자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저는 이후 노 변호사님과 함께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단지 노 변호사님이 선거에 출마하실 때마다 선거운동원으로 부산 전역을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아, 마지막으로 부산 강서구에 출마하실 때는 낙선이 너무 뻔하게 보이는 곳만 고집하는 노 변호사님이 못마땅하여 성질이 나기도 하고, 집과의 거리도 너무 멀고 해서 자원봉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낙선한 당신은 외려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다’는 가슴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구절을 남겼습니다. 이를 계기로 ‘바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정치인 최초의 후원회인 노사모도 결성이 되었으니 저의 좁은 소견이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참, 노 변호사님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1990년 4월14일에는 제 결혼식 주례를 서주셨습니다. 노 변호사님은 차가 많이 밀린다며 결혼식에 늦으셨습니다. 비록 늦게 열린 결혼식이었지만 다들 짜증을 내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저보다도 더 기뻐하고 축하해주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2002년, 이해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50년 남짓 산 인생에서 2002년은 가장 행복했던 해입니다. 그해에 노무현의 대통령 경선이 있었습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과정이 전부 드라마였지만, 저에게는 경선 과정이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 재임 당시 당신을 한번 만나기는 하였습니다. 부산지방변호사회 사무직원회에서 청와대를 방문하였을 때 ‘고향 까마귀들이 반갑다’면서 당신이 직접 참석하였을 때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서 뵈었던 것이 전부입니다.


재임 기간이 끝나면 자주 찾아뵙고 버릇없이 굴면서 술 한잔 올리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집사람에게 봉하마을 한번 가자 말만 하고는 찾아뵙지도 못하고, 봉하마을에 전자편지라도 한통 보내자고 하면서도 게으른 탓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추모의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당신이 겪었던 부림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니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 유공자로까지 인정받았던 우리를 용공주의자라고 매도하며 부림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이 다시 차오를 무렵 당신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개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영화가 우리의 억울함을 잘 대변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당신의 그림자가 깁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변호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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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발노인
2013. 12. 17. 08:58 진실탐구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의 준말이 '솔까말'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남들은 어찌 생각하건 말건 내 생각과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털어놓겠다고 이 블로그를 시작한지 1년여가 되어간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지난 9월부터 글을 쓰지 않았으니 1년에 훨씬 못 미치는 셈이다.


지난 9월에 내가 당분간 글을 쓰지 못한다고 올린 이유가 

각종 학습량 때문에 바빠질 것같기 때문이라 했었는 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솔까말 뭐 내용도 변변치 않고 하는 일도 별게 없는 상황에서 

매일 글을 쓴다는 게 부끄러워 졌다고나 할까.


무엇보다도 국내 정치적 상황이 개판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매일 정치이야기만 써 올린다는 것도 주제 넘는 짓이고


그렇다고  정작 중요한 정치이야기는 뒷전에 미루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만 풀어놓는 것도 객적은 짓이라 

당분간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 아닐까.


더구나 많은 중요 정보들이 인터넷에 파묻혀 있어 애써 힘들게 찾아야하는 상황에서

내처럼 별 볼일 없는 내용으로 판을 어지럽히지 말자는 것도 그 한 이유였을 것이다. 


잘 아시다시피 이미 중요한 국내상황은  외신을 통해 일아보는 것이 더 적확하고

걸핏하면 종북으로 몰아대며 입을 뻥끗하지 못하게 하는 시대가 오고 있지 않은가?

유신독재시절을 교활하게 살아온 우리에게는 위험에 대처하는 DNA가 잘 발달해 있다.


내가 저질러 놓은 일도 아닌 데 뭐 나라 꼴이야 좀 망가지면 어때?

그저 소시민으로서 한표 정도의 영향력밖에 없는 나로서는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 것이 바른 처신이라는 강변하에 

당분간 글을 쓰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학생들간에 '안녕하십니까?' 대자보가 주목을 끌고 있다는 상황에서

내 자신은 과연 안녕한가?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고 

그래도 가슴 한켠  불편한 느낌을 토출할 필요는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블로그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다만 정치 이야기는 최대한 줄이되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기본 인식위에서

설령 여기에 많은 글을 올리지는 않더라도 

항상 옳바른 정치를 염원한다는 소망을 담아 글을 쓸 것이며 

매일 글을 써야 한다는 속박에서도 벗어나 자유롭게 글을 올리고자 한다.


자유! ... 언젠가 내가 '선택의 폭'이라 정의했던 자유!!

그래 자유가 그립다.


씨바 이순의 나이에 자유가 그립다는 말을 내뱉어야 된다니...


http://www.youtube.com/watch?v=vttGFtUSS-8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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